비밀의 언어 · 불이일원론

좁은문,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네 시작은 미약하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 예수의 자취/ 성경의 오류- 진리란?

일념법진원 2014. 12. 4. 07:46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눅 13:24)

욥기(1):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사실. 얼마전에 '선한목자'와 이리와 길잃은 양' 이라는 말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으며, '네 시작은 미약하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라는 말 또한 책과 이곳에 설명된 적이 있는 말이다.

 

사실. 인류의 역사서를 두루 살펴보니, 올바른 지식, 즉 진리를 설했던 인물들은 극 소수에 불과했으며, 시대순으로 본다면... 소크라테스와 석가모니 그리고 노자가 기원전 6세기 경의 인물들이다. 그리고 장자가 기원전 3세기 경이며, 예수는 1세기 경의 인물인 것 같다. 물론 그 이외에도 '진리'의 본질에 대한 설명들을 볼 수 있었는데, '상카라의 불이일원론'이 올바른 앎이며, '라마나-마하리쉬'의 말 또한 그 본질은 하나이다.

 

 

사실. 예수는  '언술이 뛰어난 자들이 나의 말을 옮기는 자들이다'는 뜻으로써 '나의 말을 옮기는 자가 곧 그리스도의 적이다'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물론 예수의 말이 왜곡되면서 우상숭배사상으로 변질된 '성경'을 이르는 말이며, '하나님 말씀' 이라는 말에 대해서 집착하는 자들의 '하나님이 있다'는 사고방식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 말, 말들에 대해서 주장하는 자들을 이르는 말이다.

 

사실. 진리는 지극히 단순한 말이며, 지극히 논리적인 말이다.

인간들의 '하나님이 있다'는 주장은 '예수'의 방편설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말이다. 사실, 논리적으로 보더라도 '하나님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이 없다'는 말과 상대적인 말이다. 사실, '하나님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과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서로가 진리라고 싸운다면... 누가 옳은 것이며, 누가 옳지 않은 것이겠는가말이다. 이는 불성이 있다고 주장하거나 불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주장들로써... 죽는 날까지 싸움만 있을 수밖에 없는 앎으로써 가치 없는 삶인 것이다. 왜하하면, 인간의 존재의 이유, 목적이 전쟁을 위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서로가 다른 타인들로부터 그렇게 세뇌당한 탓이다.

 

만약에, 부처님이 옳다는 자들과 하나님이 옳다는 자들이 '우리 이제 협상하여 서로 평화를 찾자'고 생각하여 다수결로 결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은 절대로 수용할 수 없을 것이며, 아득한 옛날부터 이어져 오는 그대로 죽는 날까지 투쟁을 멈출 수 없을 것이다. 서로가 다른 지식으로써 죽음을 불사하는 짓들에 대해서 믿음, 진실, 진리라고 주장함에 대해서 당연시 하기 때문이다. 

 

 

현시대는 누구나 문자에 대해서 밝다는 뜻의 '文明'사회이다.

가장 보편타당한 언어로써, 지적으로 이해가 가능한 말이 그들, 인류 성인들의 말이다.

 

분명한 것 하나는. 그들 또한 분명히 그대와 똑 같이 사람이며,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생각하든, 남몰래 했던 사랑으로 태어났다고 생각하든, 불륜이라는 말과 같은 방식으로 태어났다고 생각하든... 어쨋든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난 사람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둘째. 인간들이 '하나님'이 있다고 주장하거나, '하나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말은, 근거가 없는 말이며, 단지 근거가 있다면, 예수의 방편설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내가 하나님이다'라고 말을 한 것이 아니라, 단지 '나의 말은 하나님 말씀이다'는 방식으로써 '하늘의 관점에서 보니...' 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라는 질문에 답하기를... '네 안에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네 안에 있다" 는 말... 그 말이 진리이다.

이 말은. 네 마음안에 있다는 말로 이해 할 수도 있으며, 네 기억속에만 있는 것이다는 말로 이해 할 수도 있을 것이며, 네가 보고 듣고 배웠던 지식으로써는 찾을 수 없는 것이라는 말로써도 이해 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사실적인 것인가, 아니면 사실적이 아닌 허구적인 것인가에 대한 올바른 사유로써 그것의 사실여부에 대해서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 왜냐하면 현시대 지식은 논리적이라는 말과 육하원칙이라는 법칙으로 어긋남이 없어야만 하는 것이며, 논리적이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있다는 생각'은 누구의 생각인가' 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누군가는 있다고 생각하며,누군가는 없다고 생각하며, 누군가는 모른다고 생각하며, 누군가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며, 누군가는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며, 누군가는 헛소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생각들이, 모두 사람들의 생각이다는 것이다. 생각하는 주체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제각기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각기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은... 제각기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어서 아는 앎, 즉 기억세포에 저장되어 있는 지식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것이다. 

 

 

'네 시작은 미약하나' 라는 말은... 이미 지식으로써 분별심으로 가득찬 마음이 있기 때문에 '나와 너, 선함과 악함, 삶과 죽음, 천국과 지옥'이라는 분별심에 의해서 진리를 볼 수 없기 때문에 '하루종일 기도하는 일은 미약하기 이를데 없으나' 라는 말로써 일념명상법의 시작을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한 바와 같다. 

 

사실.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이해 할 수 없으나, '너희가 어린아이시절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 즉 신, 성령, 불성, 영혼... 진리를 볼 수 없다' 라는 말이다. 

 

이 말은. 어린아이시절에는 '너와 나' 라는 분별심이 없었으며, '선과 악'이라는 분별이 없었으며, 천국과 지옥, 하늘과 땅이라는 분별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깨달아 아는 앎으로써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다'는 뜻이며, 그런 상태에 대해서 "그 날, 너희와 나와 하나님이 둘이나, 셋 등의 이원성이나 다양성으로 구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다" 라고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이일원론'이라고 하는 것이며, '중도' 라고 하는 것이며, 지식을 초월한 진리라고 하는 것이다. 

 

 

좀더 깊은 단계로 들어가 보자. 

그대는 지식인이다. 그리고 지식은 언어에 대해서 아는 것이며, 언어에 대한 이해의 정도는 지식 수준의 정도이에 따라서 천차만별이다. 예를 든다면 언어에 조금 더 깊이 세뇌당한 자들에 의해서 '자폭태러'라는 말의 목숨을 건 행위들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종교들 또한 그러하며, 미신들 또한 그러하며, 인간들의 지식들 모두가 사실상 그러하다. 서로가 옳다는 착각에 의한 행위들이 현시대의 삶의 실상이며, 삶이 곧 경쟁이며, 논쟁이며, 다툼이며, 투쟁이며, 전쟁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왜, 그런일이 일어나겠는가? 

그렇다. 그대는 그대가 기억할 수 없는 시절부터 말을 배웠으며, 그 말에 대해서 사실로 여길 수밖에 없는 까닭은, 사실 그 말, 말, 말에 의존하여... '내가 있다, 내가 여자다, 내가 남자다, 내가 사람이다' 라고 알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있다, 내가 사람이다, 내가 피조물이다, 내가 중생이다'는 앎이 생겨난 것이며, 더 나아가 '나는 이런 사람이다'는 분별심에 대해서 당연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나는 부처님을 믿는 사람이다'라는 사고방식은... 결국 서로가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서로 다른 사고방식으로 세뇌당한 결과이다. 그대가 성령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대가 성령을 믿기 전에, 불성을 믿는 사람에게 세뇌 당했다면... 그대는 지금 불성이 옳다고 주장할 것이며, 불성을 믿는 사람 또한 불성을 믿기 전에 성령을 믿는 사람에게 세뇌 당했다면... 성령이 옳다고 주장할 것이다. 

지식의 무지의 결과이다. 근거 없는 주장들이며, 올바른 앎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누구나 '영혼'이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물론 영혼이 있다고 믿든, 없다고 믿든, 예수를 믿든, 석가를 믿든, 조상신을 믿든 무슨 상관이겠는가만은... 다만 중요한 것은 그런 각기다른 사고방식으로써의 세뇌당함(지식으로부터)으로 인하여 인간들의 삶이 행복이나 평화가 아니라, 아득한 옛날부터 현시대까지도 투쟁과 전쟁이 아닐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존재의 이유가 고작 그것이란말인가? 

 

지식이라는 것들이 겨우, 남들과 투쟁을 위한 도구로써 필요한 것들이어서야 되겠는가말이다. 사실. 인간세상에서 가장 잔약무도한 무리들이 있다면, 예수와 석가모니를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며 자기를 주장하는 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인간들에게 짐승보다 더 뛰어날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종교들간의 전쟁과 갈등, 싸움들... 이념전쟁들을 보노라면, 인간들에게 길들여져서 피를 흘리며 죽을 때까지 싸우는 축생들과 다름이 없다. 인간의... 존재의 이유가 고작 남들과의 투쟁이며, 전쟁이라면... 어찌 가치 있는 삶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말이다. 

 

예수의 승리하라는 말, 남들로부터 승리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런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라는 말이며, 자신의 그런 이기주의적이 아닐 수 없는 마음으로부터 승리하라는 말이다. 그리하여 삶과 죽음이 없는 그 이치를 깨달아 아는 앎으로써, 진리로 거듭나라는 말이다. 나와 너... 라는 분별심이 죄라는 말이다.

 

 

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은, 투쟁과 전쟁이 목적이 아닐 수 없는 지식의 허구를 깨달아 아는 진리를 발견하기 위한 길을 이르는 말이다. 하늘아래 어느것도 우상으로 숭배하지 말라는 말 또한, '하나님'이 우주 너머 어디엔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네 안에 기 때문이다' 라는 말과 같이 자신의 마음의 실체를 찾으라는 말이며, 자신으로부터 승리하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네 안에 있다"는 말은... 너희가 어린아이시절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으나, 순수의식의 어린아이시절과 같이 '너와 나' 라는 분별심이 없던 시절이 있었으며,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없었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너희들 또한 본래에는 '아상, 인상, 수자상, 중생상'이라는 분별심이 없었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분별망상에서 벗어난 올바른 앎, 진실된 앎으로써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하루종일 기도하라는 말은, 이웃과 싸우고 이겨서 승리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는 뜻이 아니다. 다른 종교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달라고, 나만, 우리만 행복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는 말이 아니다. 오직 나에게만 복을 달라고 기도하라는 말이 아니다. 죽는 날까지 남들과 싸우고 이겨서 승리하라는 말이 아니다. 일념명상법으로써 자신의 본래마음으로 회귀하라는 말이다. 그대의 본성이 부처이며, 성령이기 때문이다.

 

 

지식은 분별이며, 근거 없는 앎으로써의 혼돈이다. 

왜냐하면, 지식은 복잡하고 다양하기만 할 뿐, 어느것 하나도 올바른 앎이 없기 때문이다. 올바른 앎이 겨자씨 만큼도 없기 때문이다. 삶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인생에도 분명한 해답이 없기 때문이며, 심지어 병든 몸 조차 스스로 치유할 능력 조차도 없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 대해서도 완전하게 무지하기 때문이다. 

 

사실. 행복을 가장한 인간들의 삶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인간들의 인위적으로 가공된 모습들... 인간들의 힘겹게 투쟁하는 모습들이...  못내 안타까워, 그 길, 진리의 길을 전하는 것이다. 진리는 단순하기 때문이며, 지극히 논리적이기 때문이며, 올바른 앎으로써 인간으로써 가치 있는 삶을 위한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모든 고통을 소멸하는 방법이며, 더 나아가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한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도가의 탄생은 미약하기 이를데 없으나, 그 나중은 심히 창대하여 인류를 구원할 것이며, 개개인에게는 해탈의 길을 안내할 것이다. 인간이 행복과 자유, 평화를 갈망한다는 것은 곧 진리를 갈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행복과 자유, 평화는 오직 진리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도가의 탄생은 세상과 싸우는 곳이 아니라, 지식과의 다툼이 아니라, 진리의 길을 전하는 곳으로써 '새로운 예수의 탄생이며, 새로운 석가모니의 탄생이며, 새로운 노자와 소크라테스의 탄생으로써 그들의 가르침의 본질, 즉 진리를 전하는 인간세상의 유일 무이한 곳이다.   

현시대는 그들이 존재했던 '文盲(문맹)'시대가 아니라 文明시대이기 때문이다.

 

문명이라는 말은. '글월 문' 자와 '밝을 명' 자로써의 '문자의 밝음'이라는 뜻이다. 문맹시대라면 진리 또한 단견이나 소견, 편견으로써의 주장으로써 다툼이나 논쟁, 논란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현시대는 문명시대로써 자신의 앎에 대해서 무턱대고 주장할 수는 없는 시대이다.

논리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지식이든지 '앎'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지극히 논리적이어야 하는 것이며, 육하원칙이라는 법칙에 한치의 어긋남이 없어야 한다. 

사실 진리가 그러하다.

아니, 오직 진리에 바탕을 둔 앎만이 그러하다. 

 

진리에 바탕을 둔 앎만이 지극히 논리적이며, 육하원칙의 법칙에 한치의 어긋남도 용납될 수 없는 올바른 앎이라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명시대이기 때문에... 지식으로써도 분명히 납득할 수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인간세상에 그 길, 올바른 앎, 진정 가치 있는 삶을 위한 방법인 진리, 진리의 길을 전하려는 것이다. 

 

인간 삶에 있어서 가치 있는 삶이 있을 수 있다면, 오직 진리에 대해서 이해 하는 앎에 바탕을 둔 삶이기 때문이다. 사실. 진리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없는 삶이라면, 살아갈 가치 조차 없는 삶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예수와 석가모니를 갈라 놓은 지식들... 서로 편가르기를 하여, 전쟁을 부추기는 광신자, 맹신자들... 그들 삶이 어찌 가치 있는 삶일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아니한가?                

 

진리와 함께하는 이들에게 영원한 평화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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