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언어 · 불이일원론

카발라의 신(神) : 아인 소프와 세피로트/ 지식과 신비주의 - 인간과 신. 그리고 진리에 대한 사유

일념법진원 2015. 2. 8. 09:51

카발라의 신(神) : 아인 소프와 세피로트

 

카발라

세피롯(생명나무)카발라(Kabbalah)는 유대 신비교의(또는 유대교 신비주의)를 말한다. 히브리어 '키벨'에서 온 말로, '전래된 지혜와 믿음[≒전통]'을 가리킨다. 세계의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신비주의 전통과 일맥상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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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발라 신비가들에게 신(神)이란 우리가 종교적 경험과 계시로서 알 수 있는 신,

그리고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비밀의 신,

기지(旣知)의 신과 미지(未知)의 신이라는 두 가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카발라 신비가들은 이 두 가지 모두가 기실은 통일된 것이며

같은 것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노시스의 가르침에서는 지각가능한 창조주로서의 신과 감추어져 있는 신은

두 가지 상반된 원리로서 나오고, 감추어져 있는 신이 더 원초적인 신이며 인간도

이 신의 형상을 따라서 창조되어졌다고 말한다.)

 

여하튼 이 신에 의해 카발라의 세상이 창조된다.

카발라 신비가들은 이 창조를 무(無)로부터의 창조라 일컫는다.

 

여기서 無는 단순히 없음(nothing)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속성이 드러나지 않고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을 일컫는 것이다. 이 無를 히브리어로 하면 아인(Ayin)이 되며,

이는 곧 존재를 초월하는 자인 神을 일컫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로부터의 창조란 다른 말로 하면 ‘신’으로부터의 창조가 되는 것이며

이는 발산(發散)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세피롯트리-생명나무

 

최초의 창조행위, 즉 발산이 있게 된 이유는 신이 자기 자신의 얼굴을 보고 싶어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신이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무한한 존재, 존재이면서 無인 존재(Ayin Sof)로서

그 자신이 전부인 절대적 존재였기 때문이다.

 

즉 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신은 절대적 전체인 아인 소프에서 물러나 공간을 만들어내어

존재자의 모습이 비칠 거울의 영상이 나타나게 하려고 하였다.

 

이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면 한 줄기 빛이 신의 의지에 의해 발산한 것으로 말할 수 있다.

이 발산에는 10가지의 단계가 내재하는데

이 10가지의 단계는 또 각각의 신의 속성들을 나타낸다고 한다.

 

이 열 가지 속성은 모두 합쳐서 세피롯(sefirot)이라고 불리며

하나하나의 속성들은 단수로 세피라(sefirah)라고 부른다.

 

이 세피롯은 한번 발산된 이후 언젠가는 다시 무로 돌아갈 때까지

영원히 일련의 상호관계 속에서 존재하며, 이 일련의 상호관계들은

또 세 가지 감추어져 있는 신의 원리(신의 광채 : Zahzahot)에 따라 지배된다.

 

그 원리들은 원초적 의지, 자비, 엄격한 정의를 말한다.

의지는 발산의 흐름에 균형을 잡고,

자비는 그 흐름을 널리 퍼지게 하며, 정의는 그 흐름을 제어한다.

 

그렇게 하여 이 세 가지 광채는 열 가지 신의 속성인 세피로트를 특별한 원형으로 모습을

갖추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습을 바로 생명의 나무라고 부른다.

 

 

네겹의 창조

 

세피롯의 각 단계는 세 가지 숨겨진 광채 중에서 하나의 영향아래 현현하게 된다.

그 흐름을 설명하자면 우선 중앙부에서 오른쪽으로(팽창이라고 표현된다),

 

그리고 왼쪽으로(수축이라 표현된다) 가로 질러가며 지그재그를 그리게 되는데,

그에 따라 형성되는 세 기둥 중의 중심부의 기둥은 의지(평형의 작용)을, 오른쪽 기둥은(팽창의 작용, 능동적)

 

왼쪽의 기둥은 정의(수축의 작용, 수동적)를 나타낸다. 이런 최초의 창조(발산)을 드러내는

생명의 나무는 완벽하게 신의 속성을 조형하고 있지만 아직 완전히 실현된 것은 아니다.

 

즉 신의 순수한 의지만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완전한 창조는 앞으로도 세 단계를 더 거쳐 총 4단계를 통해 완성되며 각각의 단계에서는

 

방금 본 것과 같은 세피롯들을 가지게 된다.

그 처음 단계는 위에서 살펴본 발산의 세계로 비롯

완벽하지만 실현된 것은 아니다.

 

그 다음 단계는 첫 번째 열 개의 세피라의 흐름을 거쳐 탄생한 베리아(Beriah/창조)의 세계이며,

그 다음은 예지라(Yezirah/형성)의 세계, 그 마지막이 아시야(Asiyyah)의 세계로 완성되는 것이다. 즉 10개의 세피라를 네 번 거듭해야 완성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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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내용들 중에서 중요한 말이 있다면... 아래의 내용들이다. 물론 일념명상법으로써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만이 지적으로나마 이해 할 수 있는 말이다. "카발라의 신비가" 라는 말은 사실, 신비가 아니라... 지식을 초월한 올바른 앎이며, 이름하여 '진리'이다.

'무' 에 대한 설명이 그렇다.

 

 

카발라 신비가들은 이 창조를 무(無)로부터의 창조라 일컫는다.

 

여기서 無는 단순히 없음(nothing)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속성이 드러나지 않고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을 일컫는 것이다. 이 無를 히브리어로 하면 아인(Ayin)이 되며,

이는 곧 존재를 초월하는 자인 神을 일컫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로부터의 창조란 다른 말로 하면 ‘신’으로부터의 창조가 되는 것이며

이는 발산(發散)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신비주의(지리)에 대해서 지적으로 이해 할 수 있다는 말은, 석가모니의 말이 왜곡된 경전에 기록된 '無' 와 '空' 그리고 '본래무일물' 이라는 말과 또한 이곳에 설명되는 '아무것도 없는 것의 완전함' 이라는 낱말...그리고 예수의 '하나님의 말씀' 이라는 말이, 위의 '무' 에 대한 설명과 같이 --- 無는 단순히 없음(nothing)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속성이 드러나지 않고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을 일컫는 것이다--- 는 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식을 넘어선 '진리의 앎'에 대해서 문명이 발전된 현시대의 지식으로써도 이해가 가능 할 수 있는 까닭은, 언어가 상대적이라는 논리와 "도가의 '화원'의 일념법 교육에서의 '명색의 동일시에 대한 착각'의 비유 설법들로써 누구나 이해는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일념법 수행으로써 '남들을 의존하여 아는 앎이 아니라, 스스로 깨달아 아는 앎일때' 비로소 자아와 신과의 관계에 대해서 좀 더 사실적으로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며, 일념명상법으로써 생각의 원리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을때, 그때 비로소 신비주의자가 신비주의가 아니라 지식을 초월한 진리의 앎을 얻은 '전식자'들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중도' 에서 보는 앎이란, 남들을 의존하지 않고서 스스로 깨달아 아는 앎을 이르는 말이다.

 

이는 노자의 '도와 간격이 없는 자' 라는 말과 같은 뜻이며, 석가모니의... 자신에 대해서 '여래' 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며, 예수의 자신의 말에 대해서 '하나님 말씀' 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과 같은 맥락이며, 이는 또한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과 같은 맥락으로써... 자신의 나를 깨달아 알면... '나'는 '나'가 아니라... '육체=나' 가 아니며, '육체가 나가 아닌 것' 이 아니라... 상대적인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無' 라는 지혜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석가모니의 '중도'에 대한 설명 또한 같은 맥락으로써... 세상의 창조를 사실 그대로 바르게 알고 본다면 세상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세상의 소멸을 사실 그대로 올바르게 알고 본다면 세상이 있다는 것 또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는 말이 그러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보는 자아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세상이 있는 것이며, 인식하는 자, 보는 자가 없다면... 세상은 없는 것이다, 는 말이며.... 스스로 깨달아 알때 비로소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며, 간략하게 표현된 말이 '무고집멸도' 라는 말이다.  

 

 

사실, '생명나무' 라는 말이나 '네겹의 창조' 라는 말, 그리고 신비로운 여러그림들은 모두 쓸모 없는 것들이며, 어리석은 자들의 망상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왜냐하면 소위 '도, 깨달음, 불성' 등의 진리의 앎이란 단지 개체적 자아들의 자신의 생각의 생멸현상에 대한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단지 여기서 말하는 '깨달음' 이라는 말은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써의 사념으로써 이해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일념법, 일념명상법이라는 방법의 설명과 같이... 남들을 의존하는 앎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묻는 방식으로써 자신의 마음이 '생각의 작용'에 의해서 가공된 환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하는 앎을 이르는 말이다.  

 

 

사실, 일념명상법으로써 자신의 생각의 원리에 대해서 이해 한다는 것은 지식을 초월한 진리의 앎으로써의 지혜가 생겨나는 것이며, 지혜를 얻는 것이다. 

일념법으로써 생겨나는 지혜란 자신의 몸과 마음이 영혼에 의해서 움직인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의 윤회작용에 의해서 생겨난 것으로써 몸이 기계와 같이 부품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히포크라테스의 말과 같이 몸이 '유기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 그대로 아는 올바른 앎으로써 모든 불치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며, 더 나아가 어떤 불치병이라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능력,즉 지혜가 생겨나는 것이다. 

 

일념을 깨다아서 생각의 원리에 대해서 이해 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앎으로써의 신념이 생겨나는 것이며, 이는 예수의 '네 믿음대로 되리라' 라는 말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하는 것이다. 

 

 

카발라의 신에 대한 설명으로써 '진리 의 앎'에 대해서 지적으로나마 이해 할 수 있는 까닭은 문명의 발전에 따라 역사이래 지식 수준이 가장 높은 시대이기 때문이다. 사실 식자우환이라는 말과 같이 지식은 쓸모 없는 것이지만, 진리를 이해 할 수 있기 때문에 쓸모  없는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진리와 인연있는이에게 영원한 평화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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