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앎으로 본다면... '정견'은 정견이라는 이름이며, 중도 또한 중도라는 이름이다.
하지만 언어가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언어 또한 본래 없는 것이기 때문에... )
아래는 '잡아함경. 가전연경'에 나오는 내용이라는데... 사실 경전의 모든 말들은 석가모니의 말이 아니라 하근기 중생들의 견해로써 우상숭배사상을 위해서 쓰여진 말이며, 진리가 왜곡된 말들이다. 물론 중생의 견해로써 이해 할 수 없는 말들이 있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만 설명하는 것이다.
"세간 사람들이 의지하는 것에 두 가지가 있으니, 유(有)와 혹은 무(無)이다.
취함[取]에 부딪히고, 취함에 부딪히기 때문에 혹은 유에 의지하고 혹은 무에 의지한다.
만일 이 취함이 없다면 마음과 경계를 얽어매는 번뇌를 취하지 않고, 머무르지 않으며, 헤아리지 않을 것이다.
자신에게 괴로움이 생기면 생겼다고 보고, 괴로움이 소멸하면 소멸했다고 보아 그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미혹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아는 것을 정견이라고 한다. 이것이 여래가 시설한 정견이니라.
왜냐 하면 세간의 발생을 사실 그대로 바르게 알고 본다면 세간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요, 세간의 소멸을 사실 그대로 알고 본다면 세간이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이것을 두 극단을 떠나 중도에서 말하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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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識' 이라는 낱말은 '알 지' 자와 '알 식' 자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아는 앎에 대해서 '지식'이라고 하는 것일까? 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과연 무엇을 아는 앎에 대해서 지식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사실, 올바르게 스스로 아는 앎이라면.... 언어, 말을 아는 앎에 대해서 '지식'이라는 또 다른 '이름'이 지어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언어를 아는 앎이라는 것은 다시 말하지면, 뜻이 없는 '소리'에 의미를 부여함에 대해서 인식한다는 뜻이다. 이는 본래 '언어, 말' 이 없었다는 것이며, 언어의 기원에는 언어가 없다는 말로 이해 할 수 있다.
인간 또한 '인간'이라는 말, '사람' 이라는 말, '나' 라는 말이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는 동물들의 '울음소리, 웃음 소리' 와 같은 것이다. 동물들의 소리, 또는 바람 소리...등과 같은 소리들에 대해서 '뜻'을 부여하고 그 뜻에 대해서 인식하는 것에 대해서 '지식'이라는 낱말이 창조된 것이다.
사실 '중도' 란, 언어가 본래 없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하는 앎이 언행으로 드러난 것이다.
언어가 본래 없다는 말은 '나' 라는 말이 없었다는 말로써 '나'가 본래 없다는 말이며, 더 나아가 '너, 세상, 우주' 라는 말 또한 없었다는 말로써... 나와 나가 인식하는 세상과 우주가 본래 언어로써만 존재하는 것일 뿐,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하는 앎을 이르는 말이다. 그런 앎에 대해서 '정견' 이라고 하는 것이다.
지식은 '본래 없는 것'에 대해서 '이름'지은 것들을 사실로 여기는 것이며, 진리는 지식이 사실로 여기는 언어가 사실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하는 앎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지식, 즉 사념으로써는 이해가 불가능한 것이며, '정견, 중도' 라는 말은 오직 일념법 수행으로써 스스로 깨달아 알아야만 이해가 가능한 말인 것이다.
세간 사람들이 의지하는 것은 '有'와 혹은 '無' 로써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양 극단이 아닐 수 없다.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것이 '중용'이라거나 '중도' 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지식이다. 하지만 지식은 양 극단이라는 말에 대해서 어떤 특별한 극과 극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일상의 모든 언어들이 양 극단을 오가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올바른 앎이 겨자씨 만큼도 없는 하근기 중생들... 언술이 뛰어난 자들이... 중도, 중용 이라는 말에 대해서 서로가 옳다며, 지식을 견주는 것이다.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은 치우친다는 것과 상대적이며, 옳다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과 상대적이며, 좋다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과 상대적이며, 행복하다는 것은 불행하다는 것과 상대적이며, 삶은 죽음과 상대적이 아닐 수 없는 것으로써... 지식은 분별이 아닐 수 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그 모든 분별망상들로 이루어진 것이 인간세상인 것이다.
사실, 인간세상의 지식인 이라는 자들의 '중용, 중도, 정견' 이라는 말에 대한 주장들 또한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들의 괴변이며, 말재간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런 하근기 중생들의 말에 대해서 왜,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들의 말재간이며, 쓸모없는 자들의 주장이라고 하는가 하면, 사실상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것" 이라는 말이 있으나, 그런 말에 대해서 올바르게 인식(이해, 인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들의 '내가 있다, 또는 '내가 사람이다' 라는 앎(말, 지식) 자체가 정견이 아니라, 단견이며, 편견으로써 양 극단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들의 '나와 너, 선과 악, 행복과 불행, 삶과 죽음' 등의 지식으로써의 모든 앎이 상대적인 말로써의 분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세상의 모든 앎에 대해서 단견이며, 편견이며, 소견일 뿐 올바른 앎이 겨자씨 만큼도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 하나는... 그대의 모든 지식으로 아는 앎들이... 아니, 인간들의 모든 지식들... 모두가 스스로 깨달아서 아는 앎이 아니라 타인들로부터 듣고 배우고 익혀서 아는 앎이라는 것이다. 그런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인식할 수 있어야만 올바른 앎이라는 말이다. 남들도 모두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그렇다' 고 생각한다면... 길잃은 어린 양새끼와 다르지 않은 것이며, 하근기 중생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며... 가치 없는 삶으로써의 삶이니... 삶 자체가 고통이 아닐 수 없는 것이며, 가치 있는 삶일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위의 석가모니의 가르침이라는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 있다면,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아는 것을 정견이라고 한다] 는 말이다.
"다른 사람의 지식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아는 앎이 '정견'이라는 말" 은... 세간 사람들의 모든 지식은 정견'이 아니라는 말이며, '중도' 가 아니라는 말이다. 지식은 모두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듣고 보고 배워서 익힌 것들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며, 다른 사람들의 말들, 다른 사람들의 지식을, 다른 사람들의 삶을 흉내 내는 것이 고작이기 때문이며, 올바른 앎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중에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아는 것" 이라는 말의 뜻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견해는 '정견'이다. '정견'이라는 말은 '올바른 견해' 라는 뜻으로써 지식의 앎이 아니라, 진리의 앎이며, 스스로 깨달아 아는 올바른 앎을 이르는 말이다.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아는 것" 이라는 말은, 일념법, 일념명상법으로써 자신의 내면에 간직된 앎이 드러나 아는 앎을 이르는 말이다. 이는 종교나 과학 등의 세간 사람들의 모든 지식이 사실적인 앎이 아니라 허구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앎을 이르는 말인 것이다.
"다른 사람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아는 것" 이라는 말은 인간은 누구나 다른 사람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아는 것'은 없다는 말이며, 오직 일념명상법으로써 스스로 깨달아 아는 앎'을 이르는 말이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근본과 같이... 즉 '무상한 것은 나가 아니며, 마음 또한 나가 아니기 때문에... 나 아닌 것을 나라고 생각하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방식의 일념명상법으로써 스스로 깨달아 아는 앎 만이 올바른 앎이며, 정견이라는 것이다.
사실 인간이 이런 말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다면... 석가모니를 이해 하는 것이며, 예수를 이해 하는 것이며, 소크라테스를 이해 하는 것이다. 물론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에게는 보편타당한 앎이며, 너무나도 당연한 앎이기 때문에,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양 극단을 떠난다는 말 또한 -세간의 발생을 사실 그대로 바르게 알고 본다면 세간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요, 세간의 소멸을 사실 그대로 알고 본다면 세간이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라는 말로써 인간의 관념을 초월한 말이다.
왜냐하면 '세간의 소멸' 이라는 말은 '세상, 우주, 자아' 가 본래 없는 것이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새간의 소멸'에 대해서 비유를 든다면- "죽은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아, 세상, 우주가 없다' 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또한 그대가 깊이 잠들어 있는 동안에 모든 사념이 사라지므로써 아무것도 인식할 수 없는 상태와 같은 것이다.
이 말은 또한 우주. 자연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있다고 아는 지식이 그릇된 앎이라는 말이며, 우주를 인식하는 개체적 자아가 있기 때문에 우주가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은 또한 '일체중생개유불성'이라는 말과 같이 모든 중생에게는 '불성'이 있다는 뜻이며, 길잃은 양새끼와 다르지 않은 개개인의 인간에게 '네 안에 하나님'이 있다는 예수의 말과 같은 뜻으로써... 개체적 자아가 '스스로 깨달아'서 순수의식과 같은 순수사고를 본다면, 즉 스스로 깨달아 안다면 누구나 스스로 '절대자, 창조자, 유일자, 부처' 라는 것이다.
우주가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식하는 자가 있기 때문에 있다는 말이다. 인식하는 자, 보는 자가 없다면.... 우주, 천지만물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념법, 일념명상법'으로써 그대가 깨닫고 나면, 그대가 곧 우주이며, 동시에 '우주의 창조자' 라는 뜻이다.
사실, 인간들의 삶들... 보기에는 천태만상이지만 단순하기 이를데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 앞에서 본다면... 한조각 꿈에 불과한 것이 인생이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 삶이라는 것들...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일과 잠자는 일, 번식하는 일이 고작이다. 다만 야생동물들의 생활과 다른 점이 있다면... 끝없는 욕망을 쫒는 욕망의 노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 동물들에게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고도의 전문성과 본능이 있는데, 인간들의 삶에는 뚜렷한 목적 조차도 없다는 것이다. 단지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욕망을 쫒는 일이 고작이며, 욕망에 집착 하다가 병이 들면, 그 병을 치료하는 일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설령 병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삶의 목적은 욕망을 채우기 위한 전쟁이며, 삶의 결과는 누구나 한 많은 삶이며, 죽음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사실 인간들 누구나 불치병 환자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인간이 본래 결핍된 존재는 아니다. 다만 그렇게 가공됨으로써 인간이 인간이면서 인간들끼리... 서로가 싸우고 이겨서 승리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무지에 바탕을 둔 환상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아의 완성'이 존재의 이유이며,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본래 그대는 길 잃은 영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대의 나 아닌 나, 그것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의 기원이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리와 인연있는이에게 영원한 평화있기를.
일념명상의 집 '도가' 에서 ---> http://blog.daum.net/powwr116/?t__nil_login=my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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