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과 중도 · 방편설 - 말변사

신인합일 사상과 불이론 / 신비주의와 지식/ 영성과 영혼, 참나 진아 에 대한 오해와 진실 - 지식의 무지와 진리에 대한 사유

일념법진원 2015. 2. 9. 08:17

2. 신인합일 사상과 일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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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신비주의에서 신과의 합일을 말할 때, 거기에도 두 가지 차원이 있다. 쉼멜의 지적처럼, ‘무한성의 신비주의인격성의 신비주의의 두 차원이다. 이 때 전자의 경우는 상카라의 불이론(不二論)과 같은 고도의 순수한 일원론적 사상을 전개하는 것이다. 불교 신비주의도 바로 일원론 사상에 근거한 것이라고 볼 때, 궁극적 실재와의 합일이라는 측면에서는 유사한 측면을 지닌다. 예컨대 궁극적 실재를 열반이라고 한다면, 무아를 통한 열반의 증득이 곧 우주적 합일의 차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양자가 모두 모든 존재를 넘어선 존재, 혹은 심지어 무(not-Being)’로도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유한한 사고의 범주로 설명 될 수 없는 무시간적, 무공간적인 절대적 존재로서의 유일 실재(Only Reality)와의 합일이기 때문이다.


나사피가 당시의 신학자와 철학자들을 거부하고 일원론을 주장한 이유는 세계에 오직 유일한 존재만이 있고, 그 존재가 신이라는 것이다. 그의 논리에 의하면, 신이라는 존재 이외에 어떤 다른 것들이 존재한다면, 각 존재는 의존적이거나 분리되게 된다. 그러나 신은 그 어떤 것에도 의존되지 않는 독립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가 유일한 것이라면 둘이 될 수 없고, 그것은 시작도 끝도 없다. 결국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항상 있어 왔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늘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또한 (알라) 이외에 다른 신은 없다는 말을 신 이외에 다른 존재는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과 존재는 동일한 개념이 된다. 이것은 범신론적 주장과도 흡사하다. 나사피에게서 신은 하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불교적 입장에서 보자면 중중무진 연기하여 발생하는 법계, 그 자체를 나사피는 하나의 유일한 존재인 신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본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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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성)과 불성(佛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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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신비사상가 나사피는 지적 통찰력을 중시했는데, 사랑이 지적 통찰의 활동을 돕는다고 했다. 사랑을 통하여 지성이 승화된다는 것이다. 그는 지성의 빛이 예리하게 빛난다 해도, 사랑의 불빛은 훨씬 더 예리하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사랑의 불빛은 지성의 빛과 결합하여 빛 위의 빛이 된다. 그리하여 그에게 사랑의 불빛은 이기심을 소멸시키는 신비로운 힘이 된다. 그런데 이 빛은 사랑과 지성의 빛이자 동시에 영혼의 빛이다. 영혼의 빛은 우주를 하나의 전체적 차원에서 바라보는 신비적 지혜(esoteric wisdom)’의 빛이다. 그렇다면 이 영혼의 빛은 곧 불교의 불성(佛性)과도 비교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의 인식이 아니라, 우주를 하나의 차원에서 바라보는 전체적 시각, 그것은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세계를 바라보는 붓다의 눈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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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위의 설명들... 언술이 뛰어난 자들의 주장들일 뿐, 모두 헛소리들이다.

다만 일념법으로써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이해 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이해가 가능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며, 그렇지 않다면 여전히 오해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하옇든 진리가 아니라 언술이 뛰어난 자들의 말재간이다. 스스로 아는 앎이 아니라... 남들을 의존하여 아는는 지식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리란... 그런 지식으로써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달아 아는 앎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앎(識)은 두 가지가 있다.

그 첫째가 '진리' 이며, 둘째가 '지식' 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 하나는... 내가 사람이다, 라고 알거나, 하늘, 우주가 있다고 알거나, 미래를 주장하는 자들이라면... 진리의 올바른 앎이 아니라, 언술이 뛰어난 자들의 말재간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진리'에 대해서 우주의 근원에 대해서 이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에 대해서 '지식'이라고 한다. 그리고 진리란, 이와 같은 인간들의 모든 생각이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허구적인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올바르게 아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이런 말에 대해서 지적으로나마 이해 하고자 한다면, "일체유심조의 더 깊은 뜻" 이라는 제목의 글을 수 차레 정독함으로써 조금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며, 더 나아가 일념법, 일념명상법 수행으로써 "스스로 깨달아 아는 앎"의 지혜가 생겨 나야만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다. 

 

 

진리는... 인간들의 모든 지식에 대해서 우주보다 더 무한한 어리석음이라고 아는 지식이다, 그리고 인간의 지식들에 대해서 무지몽매한 것이라고 단정 짓는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앎에 대해서 올바른 앎이 겨자씨 만큼도 없는 無知, 無識 이라고 주장 한다. 왜냐하면 인간들의 앎이란 모두가 '자신 스스로 깨달아서 아는 앎이 아니라 남들을 의존하여 아는 것이기 때문이며 올바른 앎이 단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 그대의 '내가 존재한다'는 앎 조차도 남들의 말에 의존하여... 듣고 보고 배워서 아는 앎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그렇지 않다는 근거는 있는가?

 

사실. 사람들의, 아니 그대 자신의 '내가 있다, 내가 사람이다' 는 앎 조차도 근거 없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보더라도 올바르게 아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런 사실에 대해서 지적으로나마 이해 할 수 있다면... 그대는 가치 있는 삶, 검증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진리와 인연있는 인물이며, 인간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며, 현명한 사람이다. 

 

인간류의 역사를 보니. '스스로 깨달아서 올바르게 아는 것'이 있는 인물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곧 '예수, 석가모니, 소크라테스, 노자와 장자' 등이다. 그리고 그들을 대변하는 말이...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이다. 

 

 

앞편에서 설명된 말이 '正見' 이라는 말과 '中道' 라는 말이며, 석가모니의 말이 한자로 번역된 후, 다시 한글화 된 것이며, 소위 '깨달음' 이라는 말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또한 노지의 '도가도비상도' 라는 말과 '명가명비상명'이라는 말에 대해서도 설명된 바와 같이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사실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 이라는 말은 사람들이 지식으로써 이해 하는 도는 진정한 도가 아니라는 말이며, 사람들이 추구하는 모든 이름들은 진정한, 즉 진실된 이름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실 이런 말들 또한 인간의 관념, 지식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써는 이해 조차 불가능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시대의 지식으로써 이해가 가능할 수 있는 이유는 지식과는 달리 진리는 지극히 논리적이기 때문이며, 그런 사실에 대해서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가의 운영자인 '화원'의 '일념법 강좌'에서 설명되는 '언어의 상대성'과 '명색의 동일시의 착각"에 대한 여러 비유 설명으로써 이해가 가능할 수 있는 것이 또한 진리이다. 그리고 그런 사실에 대해서 이해가 가능해야만 비로소 일념법, 일념명상법으로써 남들의 말을 의존하지 않는 앎, 즉 스스로 깨달아 아는 앎의 지식을 초월한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지식이 무한한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까닭은 남들의 말을 의존하여 아는 지식들에 대해서 '자기의 앎'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남들로부터 듣고 배우는 모든 앎들은 지식이며, 결코 진리일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진리'라는 말을 알 뿐, 진리를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명한 것 하나는... 진리의 앎이란... 오직 남들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아는 앎'을 이르는 말이라는 것이다.

 

 

사실, 신비주의 는 신비주의가 아니라 '정견' 이며, '중도'에서 하는 말로써 단지 '올바른 앎' 이다. 

 

사실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들... 언술이 뛰어난 자들이 '영혼, 영성, 성령, 불성, 도, 참나, 진아, 도, 깨달음' 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4차원의 우주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창조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멸망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신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도가도비상도' 라는 말과 '명가명비상명'이라는 '노자'의 말은... 사실을 사실 그대로 올바르게 본다면 세간의 모든 것들은  '이름' 으로써만 존재하는 것들일 뿐,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내가 사람이다' 라고 안다. 그리고 '내가 사람이다'라고 아는 것에 대해서 '자아' 라는 '이름'으로 표기한다. 

'스스로 자' 자와 '나 아' 자로써의 자아라는 이름이다.

 

하지만 그대는, 사람들은 누구나 '내가 있다'는 앎에 대해서 조차도 스스로 아는 것이 아니라, 남들을 의존하여 아는 것이다. "남들을 의존하여 아는 것" 이다 는 말은... 어린아이시절부터 남들로부터 듣고 보고 배워서 아는 것이라는 말로써, 스스로 아는 앎이 아니라는 뜻이다. 반면에 '진리의 앎'이란... 그런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그대로 올바르게 알기 때문에, 자신의 올바른 앎을 위해서 '남들을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의존하여 알아야 하는 것이며, 그 유일한 방법이 '일념법, 일념명상법' 인 것이다. 

 

 

사실 인간이 신을 창조하고 영혼, 영성, 귀신 등을 창조한 까닭은, 단지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의 마음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없는 까닭은 '마음이 있다'는 것 또한 남들을 의존하여 알게된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그대가 아는 모든 지식들, 모든 앎들이 그러하다.

심지어 '내가 여자다' 는 앎도 그러하며, '내가 남자다' 는 앎도 그러하며, '내가 사람이다'는 앎도 그러하며, 우주가 있다'는 앎도 그러하며, 천국이 있다'는 앎도 그러하며, 지옥이 있다'는 앎도 그러하며, 삶이 있다는 앎도 그러하며, 죽음이 있다는 앎도 그러하며, 더 나아가 '내가 진리를 이해 한다는 앎 또한 그러하다.

 

인간의 무한한 어리석음이란, 죽는 날까지도 자기를 주장하는 것이며, 자기를 알기 위해서 남들의 말을 의존한다는 것이며, 남들의 말에 의존하여 자기를 주장한다는 것이다.

 

인간들의 앎이 이토록 무모한 것이며, 어리석은 것이며,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마음을 이해 하기 위해서, 남들의 마음에 이끌려 다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이끌려 다니기 때문이다. 

 

 

그대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대의 마음이 남들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대의 마음이 교회당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대의 마음이 절간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대의 마음이 하늘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대의 마음이 우주에 있는 것인가?

아니다. 

아니다.  

 

그대의 마음은 단지 그대 안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네 안에 하나님이 있다" 고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석가모니 또한 "네 본래성품이 부처다' 라고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념법, 일념명상법'으로써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 스스로 깨달아 알라고 하는 것이다.

 

남들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아는 것'에 대해서 '정견' 즉 '올바르게 보는 것' 이라고 하는 까닭이며, 더 나아가 '자아와 우주'가 본래 없는 것' 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올바르게 보는 앎에 대해서 '중도' 라는 이름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아가 '시명(是名)불성, 시명중도' 라는 말로써 '불성, 깨달음, 중도' 또한 스스로 깨달아 아는 올바른 앎으로 본다면 '이름' 이라고 하는 것이다.

 

올바른 앎, 진리의 앎이란... 남들을 의존하여 얻은 지식들로서 제잘난체를 하거나, 알음알이를 두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아는 올바른 앎'으로써의 가치 있는 삶을 위한 유일한 법, 방법인 것이며, 더 나아가 삶과 죽음의 한계를 초월하여 검증된 삶을 위한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더 나아가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진리를 모른다면 '살아갈 가치도 없다'는 말은, 지식으로써의 모든 앎들은 다툼이거나, 경쟁, 투쟁 전쟁이 아닐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세상의 역사를 보더라도 어느 시대거나 평화로운 세상이 없었던 까닭은 진리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이다.

 

그대의 삶 또한 그러하다면... 살아갈 가치도 없는 삶인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들의  삶의 목적이 겨우 남들과의 다툼이거나 오직 자기의 이익을 위한 짓들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서로가 오직 자기만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은, 지구촌 전체가 그렇듯이... 현시대 인간들의 삶을 위한 전쟁들이 그러하듯이 인간들 모두가 죽는 날까지 오직 자기를 위해서, 자기를 주장하기 위서 존재함에 대해서 당연시 하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행복을 찾겠다는 생각, 인생을 찾겠다는 생각, 평화를 찾겠다는 생각, 자유를 찾겠다는 생각들 자체가 어불성설인 것이다.

 

올바른 앎이란, 가치 있는 삶이란...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 것이며, 남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진리를 벗삼아 사는 것이며, 더 나아가 진리가 되는 것이다. 나와 너가 둘이 아니라 평등할때, 인간들 모두가 자신의 마음이 허구적인 욕망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있을때, 그때 비로소 서로가 평등하여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의 길을 가라. 왜냐하면...

인간과 신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대가 본래 신이기 때문이다. 

 

진리와 인연있는이에게 영원한 평화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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