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론 · 깨달음. 도. 진리의 길

브라흐만과 아트만 / 붓다. 부처와 깨달음 / 진리와 올바른 앎 그 오해와 진실

일념법진원 2014. 6. 26. 07:23

브라흐만과 아트만, 참나와 진아, 부처와 깨달음... 모두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물론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결코 이해 하거나 납득할 수 없는 까닭은 "그것"은 인식될 수 없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것에는 형체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소리와 형상'으로 여래를 보려는 자들에 대해서 삿된 길을 가는 자라고 표현했던 인물이 석가모니이며,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말이 예수의 진언이다.

 

그것의 다른 이름이 노자와 장자의 "도" 이며, 석가모니의 "중도에 앉았으니 그 이름 부처로다" 라는 '부처'이며, 아트만, 브라흐만 등으로 표현된 것이다.

 

이런 말, 말, 말들에 대해서 "깨달음"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그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 말들에 대해서 상상하는 것이다.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깨달은 자" 라고 한다. 아니다. 깨달은 자란 없다. 왜냐하면 "깨달은 자" 라는 말은 "깨닫지 못한 자" 라는 말과 상대적인 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한것이다.

 

물론 '일념명상법'으로써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이라면 "그것" 이 "생각의 원리" 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길을 가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 또한 생각이라는 생각이며, 생각이라는 말에 불과한 것이다. 현시대의 가장 고급 지식으로써 이해가 가능할 수 있는 말이 "생각의 원리"이기 때문에 '생각'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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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의 궁극적 목표는 '해탈'이다.

"해탈"이라는 말은 낱말의 뜻 그대로 '이해 하여 탈출한다'는 뜻이다.

사실은 "심해탈"이다. '마음'을 이해 하여 마음으로부터 탈출한다는 뜻이며, 마음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마음이 있지만, 마음이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스스로 깨달아 알아야만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무위자연의 자유라는 말로 표현했던 인물이 '노자'이다.

 

 

지식은 '브라흐만'에 대해서 '不感者' 라는 말로 표하는 것 같다.

"그것"에 대해서 '불감자' 라고 하든, 부처라고 하든, 아트만이라고 하든, 그것은 그것이 아니다. '불감자'라는 말 또한 망상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마음이 있지만 있는 것이 아니며, 마음이 없지만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겠는가?

 

아니다. 아니다. 라는 말과 같이 '육체가 나가 아니다'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앎으로써 욕망과 집착이 모두 사라진 마음이 있다는 뜻이다.

 

"그것"에 대한 미묘한 말들이 무수히도 많기 때문에 인간들은 '일념법 수행'은 하지 않으면서도 그런 말, 말, 말과 자신을 동일시 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같다. 헛된 짓들이다. 오직 일념법 수행으로써만 자신의 마음의 실체를 이해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브라흐만, 아트만' 등의 수많은 말들은 기원전부터 구전으로 전해져 오던 옛 말들이다. 소리와 형상으로는 볼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그런 말, 말, 말들에 묶일 수밖에 없는 어리석음에 의해서 그 길이 왜곡되고 변질되어 종교나부랭이들이나, 종교들보다 더 많은 수행 집단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된 것이다.

 

 

 

아래의 브라흐만에 대한 꾸며진 말들을 보니, 그 언술, 말재간들이 참으로 현란하다.

 

-. 실로 브라흐만은 남에게 보여지지 않고 스스로 보는 것이며, 남에게 들려지지 않고 스스로 듣는 것이며, 남에게 생각되어지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며, 남에게 인식되지 않고 스스로 인식하는 것이며, 이 밖에 보는 자가 없고, 이밖에 듣는 자가 없고, 이밖에 생각하는 자가 없고, 이 밖에 인식하는 자가 없다... 는 방식이다. (브리하드 아란야카) 라는 자의 글인가본데... 쓸모 없는 것들이다.

 

일념을 이해 하는 사람이라면, 일념명상에 든 상태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겠지만, 일념을 모르는 자들에게는 여전히 우이독경일 수밖에 없으며, 또 다른 상상의 나래를 펼 수밖에 없는 말들이다.

 

-. 우주에 있는 모든 사물들의 내면에는 주재자가 있다. (이샤)

이것이 자연과의 관계에 있어서 브라흐만의 진실이다. 번갯불의 섬광이든, 눈의 깜박임이든 나타난 힘은 모든 브라흐만의 힘이다. (케나)

 

-. 불멸하는 것이 실재이다. 마치 타오르는 불로부터 무수한 불꽃이 위로 날아 오르듯이 '불멸자'의 심연으로부터 모든 것이 일어나며, 그들은 다시 불멸자의 심연으로 내려간다. (문다카)

 

-. 저 존재는 스스로 빛나며 '무형체無形體"이다. 그는 모든 것의 안과 밖에 머문다. 그는 태어나지 않으며 청정하고, 가장 큰 것보다 더 크며, 호흡도 없고 마음도 없다. (문다카)

 

-. 말로 표현할 수 없으나, 그것에 의해서 혀가 말하는 것이며, 그것이 브라흐만임을 알라. 브라프만은 인간이 예배드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이해 할 수 없으나 그것에 의해 마음이 이해 하게 되는 것이다. 눈으로 볼 수 없으나 그것에 의해서 눈이 보게 되는 것이다. (케나)

 

 "그것"에 의해서, 라는 말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에게는 보편타당한 앎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각'이며, 그것의 근원에는 '나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생각 또한 생각에 불과한 생각이며,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니.

 

 

"아트만은 무엇인가?

 

-. 아트만은 오직 아니다, 아니다, 라고 표현될 수밖에 없다.

 

그를 잡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파괴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파괴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물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물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속박될 수 없더, 움직일 수 없고, 훼손될 수 없다. (브리하드 아란야카)

 

 

--- 소금덩어리를 물에 던져 녹아버리면 다시 건질 수 없지만, 그 물은 짠맛이듯이, 오, 마이트레이여, 개아가 해소될 때 ((개아個我'가 자취가 사리져 없을때, 나라는 생각이 죽을때)) 그것(나아닌 나)는 무한하고 초월적인 청정한 의식이며, 영원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성한 빛 속에서 모든 의식(언어, 앎, 마음)이 사라질때, 그것도 사라지는 것이다. 진아의 의식이 있는 곳에는 더 이상 개체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브리하드 아란야카)

 

-. 그것은 미묘한 본질이며, 만물이 그 안에 존재하는 그것이 바로 진리이며, 아트만이다. 그리고 오, 스베따게투여, 그대가 바로 그것이다. (찬도가야)

 

 

 

 

 

--- 네 안에 하나님이 있다던 예수의 말이며, 네 본래성품이 부처라는 석가모니의 말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니, 일념법 수행으로써 그대의 마음의 실체를 깨닫는다면, 아니. 일념을 깨닫기만 하더라도 납득할 수 있는 말이다. 일념을 모른다면??? 여전히 소귀에 경을 읽는 격이니.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중생이다.  

 

 

-. 브라흐만은 그보다 더 먼저의 것도 없고, 그보다 더 나중의 것도 없으며, 그보다 더 속의 것도 없고, 그보다 더 밖의 것도 없다. 이 브라흐만이 모든 것을 인지하는 아트만이다. (브리하드 아란야카)

 

 

---- 말재간들이지만 옳은 표현이다. 그것이 모든 것이며 또한 모든 것의 기원이기 때문이다.

 

 

 

 

 

 

 

 

-. ‘나는 브라흐만이다(aham brahm?smi)’라고 아는 사람은 누구나 이 모든 것이 된다.

 

신들조차도 그가 이렇게 되는 것을 막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 자신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누구건 자신과 브라흐만이 다르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아닌) 다른 神性에게

 

기도하는 자는 무지한 사람이다.

 

신들에게 그는 짐승(가축)같이 보인다.

 

가축이 사람을 섬기듯이 그런 사람들은 신들을 섬기는 것이다.

 

 

가축 한마리가 달아나도 불쾌한 일인데 수많은 가축이 달아나면 오죽하겠느냐?

 

그러므로 인간이 이런 사실을 아는 것은 신들에게 유쾌한 일이 아니다.(브리하드아란야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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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아트만의 진리는 무지한 자에게 가르쳐 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에 관한 견해는 지식에 근거하지 않는 말이기 때문이다. 가장 미묘한 것 보다 더욱 미묘한 것이 아트만이며, 모든 논리를 넘어선 것이다.

 

아트만과 브라흐만이 하나님을 아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자는, 헛된 이론을 버리고 진리에 이른다. (가타)

 

-. 말은 그를 드러낼 수 없다. 사고는 그에게 이를 수 없다. 눈은 그를 볼 수 없다. 그를 진실로 아는 현인의 가르침 외에 어찌 그를 인식할 수 있겠는가? (가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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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런 말들에 대해서 이해 하려고 노력하거나, 해석하려는 자들이 세상에서 가장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들이다. 그런 자들이 서로가 옳다며 주장하는 자들이며, 스스로 깨달았다고 주절거리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다만, 위에서 꼭 참고해야 할 말이 있는데.

 

"아니다, 아니다" 라는 말이다.

이 말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증거하는 말인 "별은 별이 아니다" 라는 말과 같은 맥락이기 때문이다.

 

 

사실. 도가의 일념법 교육 프로그램 중에 "도가의 화원"이 도반들에게 제공하는 일념을 위한 문구들이 있는데. 그 문구의 첫 구절을 보니.

 

"나는 나가 아니다, 나는 나라는 생각이다, 생각은 본래 없는 것이다" 구절이다.

 

"진리" 라는 말은 '올바른 앎'을 이르는 말이며, 예를 든다면 소크라테스의 "유일한 선은 앎이며, 유일한 악은 지식"이라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선과 악, 나와 너.... 라는 모든 분별이 올바른 앎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념법. 일념명상법이 진리를 향한 유일한 길이다.

 

인연있는자여, 그대에게 평화 있기를...

 

 

'일념명상의 집 "도가"' 일념법 교육 신청하는 곳 --->> http://blog.daum.net/powwr116/?t__nil_login=mybl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