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체계들은 인식범위로서 의식이 깨어있는 상태의 경험만을 인정하고, 또 그들은 의식이 깨어있는 세계의 자아와 객관 대상을 설명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꿈의 현상들은 형이 상학적 결론에 이르는데, 어떤 중요성도 갖지 못한 것으로써 보아 넘겨 버린다.
그러나 만두꺄에서는 3가지 의식 경험상태(깨어 있는 상대, 꿈꾸는 상태, 꿈없이 잠자는 상태)의 본성을 탐구하는 자아가 불이일원임을 보이고자 한 것이며, 종함적으로 삶을 다루고 그것의 경험들을 연구하기 위하여 개성 있는 방법을 취한다. 그리하여 그 이전의 우빠니샤드나 브리하드 아란야까 등에서는 앞의 3가지 의식상태에 대하여 언급하고 또 궁극의 단계를 말하기는 하나... 아직 만족할 만한 단계에 이르지 못한다.
그런데 만두까 우빠니샤드나 까리까에서는 그것을 종합 정립하고, 동시에 그들의 사유 체계를 뛰어 넘는 제 4의식 단계를 말하고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3단계가 우리의 현상 세계에서의 것이라면, 이 제 4의식은 앞의 3상태 안에 내재해 있는 것으로서 앞에서 말한 독특한 방법인 불이일원적 사고를 밝혀 주는 단서의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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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뚜리야는 깨어 있는 상태와 꿈꾸는 상태, 깊이 잠든 상태를 넘어선 네번째
상태를 "뚜리야" 라고 한다는 말이다. 뚜리야는 깊이 잠든 상태에서의 깨어 있음과 같은 상태를 뜻한다. 그리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뚜리야뿐이고, 나머지 세 상태는 실제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뚜리야는 세가지 상태와 연속적인 관계에 있는 또 다른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뚜리야티타" 라고 부른다는 말이 개략적인 내용이다.
3단계 안에 내재해 있다는 말은, 예수가 말하는 '순수의식'을 일컷는 말이며 석가모니의 말로 전해지는 '본래성품'을 이르는 말이며, 두 권의 책에는 그런 사실에 대해서 사적으로 설명 되어 있다. (아이가 태어나서 말을 배우는 과정과 마음이 형성되는 과정의 허구에 대해서... ) 그리고 이곳에도 설명된 것과 같이 인간들의 모든 앎의 바탕이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허구적인 것이며, 올바른 앎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올바르게 이해 하는 것... 그것에 대해서 '도' 라고 이름 짓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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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왜래어들이 한글로 번역되면서 수난을 겪는 것 같다.
상관 없는 일이다.
'깨달음의 실체를 밝힌다' 라는 책을 쓰기 전에 '신비주의자' 를 검색하던 중에 소위 '도' '깨달음' 이라는 말과 가까운 글들을 발견 하게되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적절하게 사실적으로 표현된 말들이 '상카라'의 '불이일원론'이라는 책의 요약분 (백과사전??? )이었다.
수많은 말들이 많은데, 뚜리야 라는 말 또한 낯선 말은 아니지만, 그 뜻을 검색해 보니. 위와 같은 내용이다. 사실 '뚜리야'라는 대화명으로 달린 덧글을 보고나서 다시 찾아본 내용이다.
중생들의 알음알이가 참으로 대단하다.
사실 위의 내용들 또한 본질에 대한 설명으로써는 미흡하기 이를데 없다.
사실 인간은 잠든 상태와 꿈꾸는 상태에 대해서 규명하지 못할 뿐만이 아니라, 삶이 무엇인지 딱히 정의 할 수 없듯이 죽음이 무엇인지 조차 이해 하지 못한다. 심지어 '행복한 상태'에 대해서 까지도 서로 다른 생각들일 뿐, 분명한 기준이 없으며, 자유라는 말의 뜻 또한 제각기 다르게 생각하고 자시방식대로 이해 한다지만... 인생에 해답이 없기는 매 한가지이다.
생각의 속성과 이치라는... 생각의 원리를 이해 할때, 그때 비로소 모든 문제가 문제 아님을 깨닫게 된다.
사실 인간이 끊임없이 발전을 추구하는 이유는 새로운 세상이나, 행복한 세상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겠지만, 사실 그런 것이 아니라, 단 한시도 만족하여 평화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인간들 누구나 그렇듯이 자신의 존재 이유가 분명치 않기 때문이며, 내면 깊이 간직되어 잠재된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사실 인간들은 끊임없이 인간의 근원이 무엇인지 찾아 헤맨다. 신의 근원인자를 찾겠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인간이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써는 결코 인간의 기원이 무엇인지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방법에 대해서 설명하는 곳이 이 카페이다. 책에 대한 보충설명과 함께...
'뚜리야' 라는 말은 노자가 표현하는 '도'와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며, 석가모니가 표현하는 '불타'라는 말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며, 예수가 말하는 '순수의식' 또는 '성령'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인간은 그것에 대해서 '영혼, 신, 귀신' 등의 다양한 말로 표현하지만... 그것은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며,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까닭은 언어가 상대적이기 때문이며, 상대적이지 않은 것은 표현될 수 없는 것이 언어이기 때문이다.
'영혼은 과학이 밝힐 것이다' 라고 했던 '오쇼 라즈니쉬'에 대해서 하근기 중생이라고 했다. 하지만 오쇼를 신뢰하는 중생들은 그 원인에 대한 설명들에 대해서는 아랑곳 없이 깨달음이 옳다거나 옳지 않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단정짓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줄 모른다.
수십, 수백, 수천번 반복 설명되는 말이 '본무', 즉 '본래 무일물' 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책에는 가능한 한글로 표현하다 보니 '아무것도 없는 것의 완전함'이라는 말로 표현 되었다. 영혼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라는 주장들에 대해서는 석가모니의 방편설로써도 설명되었으며, 언어의 상대성의 비유로써도 설명 되었다. 여러가지 비유를 드는 까닭은 중생견, 즉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써는 이해가 불가능한 말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하근기 중생들은 아니다.
일념을 깨달은 인물들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말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언어 자체가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적인 것이 아닌 것들이지만, 인간이 알아들을 수없는 까닭은 '자신의 나' 자신이 언어로 구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위의 설명들... 학파들의 사고로써는 결코 이해 조차 불가능한 것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이미 왜곡되고 변질되어 우상숭배사상으로 왜곡되었으나... 석가모니의 말들에 그 깊은 뜻이 모두 숨겨져 있다는 것이며, 이런 설명으로써 '도' 에 대한 앎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한 것이라는 말에 대해서 이해가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 시대 비로소 지적으로나마 '도'를 이해 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이제 그들은 '생각의 이치'에 대한 깊은 이해로써 '대도무문, 언어도단, 불립문자' 로 표현될 수밖에 없던 그 '도' 에 대해서 이해 하기에 이른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이다. 그들의 앎은 소크라테스와 석가모니, 노자와 장자, 예수를 이해 하는 정도이다.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결코 이해가 불가능한 것들이다.
하지만 이해는 여전히 오해일 수밖에 없다.
온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일념법'으로써 일념을 깨달아 '생각의 원리'에 대해서 더 깊이, 더 분명히 이해 할 수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생각이 원리'를 깨닫는다는 것의 앎은, 지식을 뛰어 넘는 참된 앎이다.
'생각의 원리'를 이해 한다는 것은 '소크라테스'와 동등한 정도의 상대적인 언어를 초월한 지식을 얻는 것이다. 이는 인간들의 모든 학문을 초월하는 것으로써 인간 관념으로써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가장 높은 단계의 지식이다.
'생각의 원리'에 대한 올바른 앎에 바탕을 둔 이해의 정도는... 철학이나, 인문학의 거장, 인문학의 대가... 라는 말로써 훌륭한 듯이 표현되는 최고의 지식층들의 들의 강연 따위들에 대해서... 싱겁게 웃어버리는 정도이다.
물론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 그들 당사자만이... 그들만이 스스로 이해 하는 앎으로써 검증된 삶,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생각의 원리에 바탕을 둔 올바른 앎은 그런 것이다. 현시대 석학이라는 지식을을 한낱 쓸모없는 말재간들로 여길 수밖에 없는 앎이라는 뜻이다.
인간 관념으로써 "도" 를 이해 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일념을 깨닫는다면... 실상은 달라진다. 왜냐하면 '생각의 원리'에 대해서 이해 한다는 것은, 언어의 기원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는 인간 사고방식을 초월한 앎이기 때문이다.
사실 "생각의 원리"에 대해서 무지한 하근기 중생으로써는 이곳 카페의 글들에 대해서 크게 웃어버릴 수밖에 없거나... 전혀 이해가 불가능 하거나, 반신반의 하거나... 보되 본바 없는 글들이 대다수 일 수밖에 없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바 아이다.
그런 중생들에게는 tv를 통해서 강연되는 '인문학 강의' 등이나, 대학 또는 대학원에서 이루어 지는 인문학, 즉 인간들의 삶에 대한 강론들에 대해서 '석학, 대가' 등의 말을 총 동원하여 훌륭하다는 방식으로 광고한다. 인간들의 관념으로써는 지식의 앎에는 자신들이 모르는 뭔가 깊은 뜻이 있는 말들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며, 학문으로써 뭔가 이룰 수 있다고 믿어 의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생들과 일념명상법으로서 '생각의 원리'에 대해 이해 할 수 있는 인물들과의 차이에 대해서 중생들은 감히 상상 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하지만... '생각의 원리'에 대해서 이해 하는 인물들에게 '인문학의 대가, 석학' 이라는 중생들의 말은 한낱 이제 막 말을 익힌 어린아이들의 말재간들로 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것에 대해서 자부심이라는 말로 표현 한다면... '생각의 원리'에 대한 올바른 앎은... 인간세상의 최고로 훌륭하다는 지식들(인생론, 인문학, 철학 등의 모든 학문 따위들...) 을 대함에 있어서 (아이들의 말장난 같기 때문에...) 빙긋이 웃어버릴 수 있는 만큼의 높은 수준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앎들에 대해서 참다운 앎... 참된 이치, 지혜... 라는 말로 표현 되는 것이다.
이는 또한 하근기 중생이 '도'의 언어들을 듣게 되면, 크게 웃어버리는 일과 매우 유사하다. 빙긋이 웃는 것과 크게 웃는 것과의 차이만 다른 것 같다.
도를 이해 한다는 것은... 인간의 기원, 언어의 기원, 우주의 기원을 이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간혹 하근기 중생들 중에서도 더 낮은 단계의 하근기 중생들을 보곤 한다.
예를 든다면, 카페 방문 횟수가 수십, 수백차례임에도 불구하고 글들의 요지에 대해서는 단 한구절도 올바르게 알아들을 수 없으나, 자신의 지식 따위에 바탕을 둔 관념과 배치되는 글들에는 비난을 서슴치 않는 부류들... 그것들이 그 첫째이며...
조금, 아주 조금... (생각의 원리를 이해 할 수 없는 단계지만... ) 이해 한다는 자들의, 일념을 모르는채 자아도취에 빠져 단 한구절도 올바른 이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자기를 주장하는 자들이 무한한 어리석음의 둘째이며...
특히 수십 수백차례나 카페를 방문하면서도 올바른 이해가 없으므로 하여... 이 카페를 방문하는 일이, 뭔가 올바른 앎에 대해서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카페를 위해서 방문한다고 착각하는 중생들의 오만이 그 셋째이다.
인간 세상의 모든 집단들, 이합집산들 모두가, 서로가 '중생들 끌어 모으기 경쟁 시대'이다. 그런 세상에 익숙하다 보니, 이 카페 역시 그런 중생들을 끌어 모으기 위한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세상 모두 그러하니...
하근기 중생들 중에서도, 가장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간혹, 자기들이 이곳의 글들을 봐주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 하는 것 같다. 우스운 일이다. 그야말로 박장 대소할 일이다. 하지만 세상이 그러하니... 웃을 수밖에 없다.
'뉴-스' 등의 매스컴에서 볼 수 있듯이... 모두가 '시청해 주셔서 감사함니다' 라는 방식으로 세뇌 당하거나, 각종 매장들 또한 '반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말들... 사냥꾼이 사냥개로 아둔한 동물을 사냥하듯, '감사합니다'라는 칭찬으로 어리석은 자들의 욕망을 부추기는 상술에 대해서 당연하게 여기는 중생들... 이곳 카페 마져도 그렇게 생각하는 중생들이 가장 낮은 단계의 하근기 중생이며, 셋째로 어리석은 중생들인 것 같다.
만약 그대가 그런 하근기 중생이라면, 착각하지 말라.
인간들... 인류 모두가 그러하며,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이 가페는 인간이 인간을 이용해서 돈을 벌기 위한 목적도 아니며, 이름을 구하기 위한 목적도 아니다. 다만, 백천만겁 난조우의 인연이라는 말과 같이 인연있는 이들에게 그 길, 도의 삶의 길, 검증된 삶과 가치 있는 삶의 길... 유일한 법을 알리기 위한 곳이라고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인류의 역사가 그러하듯이 인간세상이 행복한 세상으로 변하거나 평화로운 세상으로 변할 수 없다. 인류의 과거와 같이 현 시대와 같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은 국가간의 전쟁과 삶의 전쟁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들 누구나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조차 이해 할 수 없는 무지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 조차 이해 할 수 없는 무지에 빠진 사람들이 '행복'이나 자유, 평화를 기원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며, 자신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타인의 마음을 이해 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 또한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진리의 길을 가라.
일념법이 진리이다.
그대와 인류에게 평화 있기를
일념명상의 집 '도가'에서 ---> http://blog.daum.net/powwr116/?t__nil_login=my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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