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언어 · 불이일원론

병속에 갇힌 새를 꺼내라 / 선문답 그 오해와 진실

일념법진원 2014. 9. 3. 06:23

그 책속에 전직 스님 출신이 있습니다. 스님이 되어 스승께 받은 문제(화두)가 무엇이냐?

 

병속의 새를 꺼집어 내라.

 

호리병같은 병속에 아기새가 들어있습니다.

어미새가 먹이를 물어다 병속에 넣어주니 아기새가 받아 먹습니다.

아기새는 무럭무럭 자라서 병속에 가득차게 됩니다.

며칠만 지나면 아기새는 몸집이 더 커져서 죽게 됩니다.

 

1. 병에 끼여서 죽는다

2. 병에 끼여서 먹을 것을 못먹어 굶어서 죽는다.

3. 병에 끼여서 답답해 죽는다.

어차피 죽습니다.

 

문제는 죽기전에 새를 병속에서 끄집어 내면 됩니다.

조건은 병도 깨지말고 새도 죽이지 마라.

 

이 스님은 7년 동안 그 문제만 풀었습니다.

 

몇년이 지나고 나니 밤에 잠을 자면 병속에 있던 새가 좁은 병입구를 비집고 나와서

날아가는 꿈을 꿀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답은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무능함을 깨닫고 하산했습니다. 그리고 소설가가 되었습니다.

 

 

이 소설가의 화두는 그 후로 나의 화두가 되어서 나를 괴롭힙니다.

 

그 스승은 왜 그런 문제를 냈을까?

틀림없이 답이 있으니 냈을 것인데 그럼 그 답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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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에 올라온 글의 일부분이다.

 

대도무문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 뜻, 길을 모르던 시절(현세에는 일념법이 그 길이지만...) 올바른 앎이 없던 중생들의 선문답들이 공안이라는 이름으로 1700여개나 된다고 한다. 사실 '선문답'이나 또는 '법거량'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어긋난 것이다. 왜냐하면, 법이라는 것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는 말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착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에... 본무, 본래무일물 이라는 말이나, 아무것도 없는 것의 완전함이라는 말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다고 생각한 나머지... 아무것도 없으니, 허무하다고 생각하기 쉽상이다.

 

착각이다. 착각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사람들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에 대해서 이해 한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감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라는 주체가 사라진 것에 대해서 '본무, 본래무일물, 아무것도 없는 것의 완전함'이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지만... 이런 뜻 조차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에. 일념조차 깨치지 못한 자들이 '결국 아무것도 없는 것'이니. '허무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며, 지식의 끝에서는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는 것이다.

 

올바른 앎과 그릇된 앎의 차이가 그러하다. 올바른 앎일때,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며, 올바른 앎이 아니라, 지식 따위로써 도를 이해 하려는 노력의 결과는 허무주의자가 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의 자기 주장들이 더 신비스럽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앎이 진짜로 자기가 스스로 아는 앎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시절부터 남들, 타인들로부터 들었던 앎이다. 타인들의 지식을 끌어 모아서 자기가 안디고 주장하는 것이다. 마음이라는 것도 자신이 스스로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누군가가 지어 준 것이 듯, 나이도 부모로부터 들어서 아는 것이듯, 지식들 또한 타인들로부터 들어서 아는 것들이다. 그대의 마음 또한 그러하다. '내가 안다'는 말... 착각이다. 남들로부터 들어서 안다고 해야만 올바르게 아는 것이다.

 

사람들 누구가 깊이 잠듦에 대해서 경험한다.

깊이 잠들어 있을때, 그때에는, 그 동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의 상태이다. 꿈을 꿀때에도 그 꿈이 현실이다. 현실만이 현실이 아니라, 꿈도 자신의 꿈이며, 잠도 자신의 잠이며, 현실도 자신의 현실이다. 도대체 진짜 '나'는 무엇이란말인가?

 

그대가 자신을 인식할 수 있을때만, 그대 자신이며, 잠잘때나, 꿈꿀때는 그대가 그대 자신이 아니란말인가?

 

 

병속의 새를 꺼내라는 말.

쓸모 없는 질문일 수도 있으며, 가치 있는 질문일 수도 있다.

 

도가의 '화원'의 강의와 일념명상을 위한 문구에는 '나는 나가 아니다, 나는 나라는 생각이다, 생각은 본래 없는 것이다'는 구절이 첫구절이다.

이런 구절에 대해서 지식으로 이해 하는 자들의 '병속의 새를 꺼내라'는 말에 대한 이해는. 

단순한 말장난과 같이 '병은 병이 아니다, 새는 생가 아니다' 라는 방식으로써 해답을 찾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아니다'라고 부정해서 빠져 나오라는 뜻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여 자신의 마음의 변화는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며,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심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병속의 새를 꺼내라는 문제가 1700 공안 중의 하나라면... 그 뜻은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일념공부가 깊어진 인물들이라면 두 가지로 이해 할 수 있다.

 

첫째. 인간은 인간의 척도로만 대상을 보며 자연을 보며, 자신의 마음으로써 상대방의 마음에 대해서 이해 한다고 착각한다. 그런 사고방식으로써 보기 때문에 그것을 '새'라고 보는 것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당연히 '새'이다. 하지만 새의 입장에서 본다면... '나는 새다'라는 생각, 마음이 없다. 천지만물 중에  '내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직 인간 뿐이다. '새'는 내가 병속에 갇혀 있다는 생각도 없으며, 산다는 생각도 없으며 죽는다는 생각 등의 분별심이 없다. 그런 사실에 대해서 깨달아 알라는 뜻이다.

 

둘째. 아기새에게는 경험이 없다. 이는 갓태어난 어린아이의 경우와 같다.

어떤 상태로 길들여지는가에 따라서 그 상태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적응한다. 응한다는 뜻이다. 새의 종류도 다양하지만, 어떤 성질이 급한 새는 인간에게 잡혀서 작은 새장에 갇히게 되면 죽어버리기도 한다. 자연상태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야생동물이라고 하더라도, 갓태어난 새끼때부터 집에서 길들이게 되면, 야생성은 사라진다. 이와 같이 인간 또한 그렇게 길들여진 대로, '자존심'을 주장하며 살다가 죽는다. 그 자존심이 허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죽음이 본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앎에 대해서 '깨달음'이라는 말, '도' 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다. 

 

 

인간들이, 인간세상이 여전히 평화롭지 못한 까닭은 그 자존심과 자존심과의 대결에 대해서 인생이라고 생각,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 자존심. 병속에 갇힌 새에게는 없다. 병속에 갇힌 새에게는 인간들과 같은 갈등이 없다는 뜻이다.

 

 

병속에 갇힌 새를 꺼내라는 문제에는 수많은 답변이 있을 수 있다.

올바른 이치, 즉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이라면, 왜 굳이 꺼내려고 애쓰십니까? 라는 답변과 함께 그 연유를 설명할 수 있다. 또 다른 답변이 있다면... 다른 일들 즉 병속에 새에 대해서 고심할 일이 아니라... (새는 자신이 병속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너 자신이 갇혀 있는 마음의 문을 두드리라는 말이며, 그런 분별심의 근원지를 찾으라는 말이다. 분별이 고통의 시작이며 모든 고통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도가의 강좌를 통해서 '나는 나가 아니다' 라는 또 다른 타인들로부터 끌어 모은 지식으로써는, 새는 새가 아니다, 라는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을뿐, 살아오는 동안 내내 끌어모은 지식과 다름이 없는 지식으로써 말재간만 부릴 수 있을 뿐, 쓸모 없는 것들이다. 오직 일념명상법으로써 생각의 원리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을때, 그때 비로소 자신의 마음의 구성요소를 찾을 수 있는 것이며, 그것들을 버릴 수 있는 것이며, 그때 드러나는 앎이 참다운 앎이다.  

 

 

인간의 마음의 바탕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육체의 안위에 목적을 둔 욕망이 전부이다. 여기서 말하는 마음의 바탕이라는 말은 인간관념으로써는 '무의식, 잠재의식' 등으로 표현되는 상태이며, 경험에 바탕을 사고방식으로써는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상태, 부분이다.

 

마음의 최초는 '내가 있다는 생각'이며, 그 다음이 '내가 사람이다'는 생각이며, 그 다음이 '내가 죽는다는 두려움'이며, 다음이 내가 존귀하다는 자존심이며, 다음이 이를 채우기 위한 욕망이다. 욕망보다 더 먼저 각인되는 생각이 집착이다. '육체가 나다'라는 집착에서 비롯된 생각들에 대해서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되는 것이며... 잡다한 지식들과 그 모든 것들이 포함되는 낱말이 '마음'이라는 말이다.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이란, 자신의 마음이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허구적이기 때문에 일념수행으로써 그런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깨닫기 위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일컷는 말이다. 그리고 그런 사실에 대해서 지적으로나마 이해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상근기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곳의 모든 글들.... 나를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해답을 모르는체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쓰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류가 추구하는 자유와 평화를 위한 유일한 길이며 방법이기 때문이다.  

 

  

병속의 병을 꺼내라는 질문에 대해서... 도가의 강좌를 지식으로 이해 하더라도 답은 간단하다. '나는 나가 아니다' 라는 말을 대입하면, 새는 새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이해 한다고 하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신의 마음을 이해 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말재간을 배운 것과 다름이 없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구심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며, 여전히 길잃은 나그네이며, 길잃은 어린 양이며, 하근기 중생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옛말에 '남의 제삿상에 감놔라, 사과놔라'... 는 방식으로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도'에 바탕을 둔 말이다. 남의 일에 시시비비를 가리지 말고 그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관찰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아는 나로써, 통찰의 지혜로 거듭나라는 말이다. 인류의 자유와 평화는오직 그곳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가페 개설의 목적이 있다. '필독'이라는 지침과 함께.  

그런데도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자들이 있다. 인간으로써의 가장 기본적인 도리 조차 지키지 못하는 자들이 '도'를 공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불성설이다. 최소한 카페 소개글이라도 본 자라면... 어찌 그런 무례한 짓들을 할 수 있단말인가?

 

나는 어느 누구도 초대한 적이 없다.

다만 인연있는 자들을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이다.

유일한 삶의 길이며, 유일한 심해탈 방법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자들.

그것들에 대해서 개구리나  또는 더 미천한 것들... 항상 누구에게나 짖어대는 동네 강아지와 다를 바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하근기 중생이라고 하는 것이다.  

 

인연있는 자

그대에게 평화 있기를... 

 

일념명상의 집 '도가'에서 ---> http://blog.daum.net/powwr116/?t__nil_login=mybl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