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中庸)과 중도(中道)>
중용(中庸)은 유교적 개념이고, 중도(中道)는 불교적 개념이다. 그런데 이 둘을 혼돈해 혹은 같은 것이라 하고, 혹은 다른 것이라 말하는데 이 둘은 전혀 다른 사상이다.
중용(中庸)이란
<중용(中庸)>이란 공자(孔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지은 책 이름이기도 한데, 그 책 속에서 희(喜) ? 로(怒) ? 애(哀) ? 락(樂)이 나지 않는 것을 중(中)이라 하고, 희 ? 로 ? 애 ? 락이 발해 절도에 맞는 것(적당하게 사용되는 것)을 화(和)라고 말한다(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라고 했다.
이에 대해, 주자(朱子)는 <중용장구(中庸章句)>에서 “중(中)이라는 것은 치우치지도 않고, 기울어지지도 않고,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일이 없는 것이고, 용(庸)이란 평상(平常)의 뜻이다( 中者 不偏不倚無過不及之名 庸 平常也)”라고 했다. 또한 주자는 용(庸)을 떳떳함이라 했으며, 주자의 스승 격인 정자(程子)는 “용이라는 것은 천하의 일정한 이치(庸者 天下之定理)”라고 했다.
그리고 주자는 “희노애락은 정(情)이다. 미발(발하지 않은)한 것은 성(性)이다. 치우치는 바가 없는 까닭에 이를 중이라 한다. 발해져서 모든 것이 절도에 맞음은 정의 바름이다. 어그러지는 바가 없는 까닭에 이를 화(和)라 한다(喜怒哀樂 情也 其未發 則性也 無所偏倚 故謂之中 發皆中節 情之正也 無所乖戾 故謂之和)”라고 했다. 그리고 중용에 대해서는 “중을 천하의 대본이라 하고, 화를 천하의 달도(中也者는 天下之大本也요 和也者는 天下之達道也)”라 했다.
이렇듯 중국에서 말하는 중용(中庸)이라는 것은 유유자적하고, 희로애락이 치우침이나 과부족(過不足)이 없이 알맞은 상태인 정도에 대한 표현으로, 편벽되지 않는 마음가짐(不偏不倚無過不及之謂中)이다. 따라서 때와 장소에 맞게 말하고, 처신(和)하는 것을 평상의 생활로 꾸준히 떳떳하게 항상 지속(庸)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것을 실천하면 수신(修身)하고, 제가(齊家)하며, 치국(治國)할 수 있다고 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중용(中庸)이란, 있다는 생각도 떠나고, 없다는 생각도 떠나고(離有邊 離無邊),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평상심으로 정도(正道)를 지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중용의 도(道)에는 절대 선(善)이나 절대 악(惡)이 있을 수 없으며, 때와 장소에 따라 어느 누구에게나 알맞은 타당한 것이 중용의 길이다. 중용은 어쩌면 마음의 균형(均衡)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듯하다.
결국 중용이란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아주 적절한 상태 또는 그 수준을 택하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어떠한 선택을 하거나 무슨 일을 하는데 있어서 과(過)하지도 않고 불급(不及)하지도 않는 아주 적절한 정도를 선택하는 일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teles)의 중용이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teles)는 인생의 목적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 하며,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중용을 추구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도덕적 미덕에 대해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극단과 극단 사이의 중용으로 이루어진다는 것뿐’이라고 하면서, 만용과 비겁의 중간인 용기, 교만과 비굴의 중간인 긍지, 낭비와 인색의 중간인 검소를 말했다. 그는 또한 주어진 상황에서 중용을 식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적절한 사람에게, 적절한 정도로, 적절한 때에, 적절한 동기를 가지고, 적절한 방법으로 옳은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했다. 이는 중국의 중용사상에서 바로 ‘화(和)’에 해당하는 말이다. 이렇게 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도덕적 미덕인지 아닌지를 그때그때 판단하는 것이 중요한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실천적 지혜(實踐的智慧)’라 했다. 그는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것을 다루는 과학지식과 달리, 이 실천적 지혜는 어떻게 행동하느냐를 다루기 때문에 이것을 특정상황을 인식해서 선(善)에 따라 행동하는 능력의 이성적이고 진실한 상태라고 정의했다.
불교의 중도(中道)란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中道)에 나타나는 ‘중(中)’은 가운데라는 뜻이 아니고, ‘정확하다, 올바르다’라는 뜻으로 바를 정(正)자와 같은 의미이다. 따라서 불교의 중도(中道)는 치우치지 아니하는 바른 도리를 말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양극단의 중간이 아니고 진리에 가장 가까운 것을 말한다. 중도사상은 철학적인 면에 있어서나 실천면에 있어서나 모순 상극된 상대적인 차별을 다 버리고 모든 것이 융합된 절대 원융자재(圓融自在)한 대원리이다. 이 사바세계의 현실은 모순 상극이어서 곳곳에 언제나 싸움이 그칠 사이 없다. 그래서 중도에 있어서는 탐욕, 노여움, 어리석음, 번뇌에 의해서 부지 중 어떤 것에 집착하려고 하는 그 어떠한 치우침도 모두 버려야 할 것이 강조된다.
범부중생은 나와 너, 유와 무, 이것과 저것, 양과 음, 강과 약, 흑과 백 등 일체의 사물을 2분법적 차별상으로 분별한다. 이런 2분법적 사고에 사로잡혀, 좋고 나쁨, 내편 네편, 승 패와 같이 좌우를 구별하는 데에서 갈등과 투쟁이 생긴다. 따라서 세상만사의 이치를 상대적인 관점에서 이해하지 말라는 말이다.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데서 추함이란 관념이 나오고, 선(善)을 좋다고 생각하는 데서 악(惡)의 관념이 생긴다. 이와 같이 천편일률적으로 양쪽을 극단적으로 분별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이다. 깨끗하다 더럽다,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와 같은 흑백논리처럼 양 극단에 치우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
쉬운 예로 부부관계를 생각해보자, 남편과 아내라는 남 ? 여를 초월한 자리에 서게 되면 남자는 남자대로의 특성을 인정하고, 여자는 여자로서의 특성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남자의 똥고집도 인정하게 되고, 여자들의 시기질투도 이해가 된다. 어느 정도의 단계에 올라서 버리면 거기가 바로 중도의 자리이다. 초월의 자리, 궁극의 자리에 서고 보면 다 이해가 된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남남끼리 만나 일심동체 부부관계가 바로 중도의 자리이다. 약점 없는 완벽한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서로가 극진히 사랑한다면 그런 약점을 다 덮어버리고 부부가 사랑으로 용서하고 융합하게 된다. 그래서 아무 갈등 없이 아늑한 보금자리를 꾸며 오손 도손 자식 낳고 잘 산다면, 그것이 바로 이상적인 중도(中道)인 것이다.
중도란 ‘양변의 극단을 여윈’ 그런 말이다.
세상의 모든 시끄러움은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불협화음에서 생긴다. 하모니가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처럼, 서로 상대를 이해하고 남의 주장을 존중해 상생이 이루어지면 세상을 행복하게 한다. 그러므로 지극한 중도는 지혜와 자비로 귀결된다. 무조건 하나로 통일하려는 발상은 또 다른 획일주의이며, 제2, 제3의 갈등을 낳는 뿌리가 된다. 사물을 좌와 우, 흑과 백, 많고 적음 등으로 양극화 2분화? 해서 그 중 하나로 모든 것을 통일시키려는 독선주의에는 평화가 있을 수 없다. 양변을 아울러 어느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지혜, 그리하여 초월의 원융무애(圓融無碍)한 경지, 그것이 중도(中道)이다.
이러한 중도란 팔정도(八正道)라고 하는 구체적인 실천에 의해서 지탱되는 준엄한 도(道)이며, 아무런 걸림 없이 바르게 관찰하는 것이고, 올바르게 관찰하는 거기에 깨달음이 있다고 했다. 즉, 어리석은 중생의 생각으로 구성한 양극단의 상대적인 개념을 모두 근거 없음을 밝혀내서 부정하고, 궁극적인 깨달음을 지향한다. 그리하여 수행을 높이 쌓아 번뇌와 무명(無明)을 탁 깨뜨려 버리면 허공처럼 청정하고 확 트인 참마음 자리가 열린다. 여기에는 한 점의 속박도 치우침도 없다. 이것을 ‘중도의 경지’라고 한다.
따라서 ‘중도(中道)’ 앞에서는 우매한 중생들이 무명에 끄달려서 나다 너다, 옳다 그르다, 높다 낮다, 많다 적다고 하는 등의 온갖 분별이 봄 눈 녹듯 없어진다. 이와 같이 중도는 바르게 깨친 법의 안목으로서 치우침이 없는 부처의 경지를 뜻하며, 중도의 완성은 불교의 완성이라 할 수 있다.
결론
인류역사에 있어서 기원전 500년은 참으로 의미 깊은 시기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미욱한 원시세계에서 비로소 인류문명에 세련된 지성(知性)이라는 고도의 정신문화가 성립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는 그리스 문명, 인도에서는 불교, 중국에서는 유교가 성립됐다. 이 같은 시기에 중용 혹은 중도를 취한 공자(孔子), 아리스토텔레스(Arist?teles), 석가모니(釋迦牟尼)가 유사한 특징을 지녔었다는 것은 더욱 신기하다.
이상에서 논한 것들을 정리해보면, 불교에서 중도는 일체 만법이 모두 불법이다(一切法皆是佛法)이라고 말한 바와 같이 일체 모든 진리를 융합한 우주의 근본원리임을 인식해서 이것을 신앙생활에 실천하는 것이고, 공자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은 윤리 도덕적인 측면, 사회 처세적인 측면에서의 중용을 중심으로 다룬다. 그래서 개인이나 사회 모두가 정신적 완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전제를 두고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하면, 현실적인 세계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는 공자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은 정신적인 세계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는 붓다의 중도에 귀속될 것이다. 이에 따라 붓다의 중도가 공자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보다 더 높은 궁극의 자리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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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이야기...
중용과 중도에 대해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본 글이라고 하기에, 조금 줄여서 옮겨운 글이며... 모두 헛소리 이다.
왜 옮겨왔느냐 하면...
인간류의 지식의 무지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함이 첫째이며, 둘째는... 인간류의 지식이 왜 쓸모 없는 것이며, 인간류가 왜, 무지몽매한 것인지에 대해서 사실 그대로 올바르게 설명하기 위해서이며, 셋째 '중도'에 대해서 아둔한 자가 아니라면, 누구나... 지적으로나마, 추상적으로나마 이해가 가능하도록 비유를 들어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첫째. 지식이 무지한 것으로써, 무한한 어리석음을 뿐, 쓸모 없는 것이라고 하는 이유...
인간류의 지식... 즉 종교나 과학, 의학, 인문학, 문학 등의 모든 지식은...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지만, 사실, 지식이 완전하게 무지라는 사실을 인식, 인지 조차 할 수 없는 무지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하나. 지식은 지식의 시초에 대해서 무지하다.
하나. 지식은 인간의 기원에 대해서 무지하다.
하나. 지식은 언어로써 언어를 주장하지만... 사실 인간은 언어의 시초에 대해서 무지하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논리적일 수 없다는 뜻이며, 논리적일 수 없다는 뜻은... 막무간에 주장하는 것일 뿐, 근거가 없는주장이 아닐 수 없다는 뜻이다.
하나. 지식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려 하지만... '설명'이라는 낱말의 뜻 조차 올바르게 정의(설명) 할 수 없기 때문에... 논리가 아니라, 논란이 아닐 수 없는 것으로써 지식이 아니라, 무지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 지식은... 저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심리학, 정신분석학이 있으나... 마음에 대해서 정의할 수 없으며, 정신이 무엇인지 조차 정의할 수 없으며... 스트레스가 무엇인지 조차 정의할 수 없다.
하나. 지식은... 저 자신의 몸에 대해서 조차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에... 암의 원인 조차 밝혀낼 수 없을 뿐만이아니라... 암의 뿌리도 밝혀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으로서 무지가 아닐 수 없는 것이며... 저 자신의 몸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저 자신을 스스로 치유할 수 없기 때문에 무지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 사실 지식은... 인간은, 인간이 무엇인지 조차 정의할 수 없으며, '우리는 사람이다' 라는 앎에 대해서 천연덕스럽게 말 하지만... 사실 인간류의 '우리는 사람이다'는 말 조차 정의할 수 없는 까닭은... '우리가 사람이다, 내가 있다'는 앎들 또한... 아무런 근거가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나. 인간은 신이 있다, 하나님이 있다. 부처님이 있다, 영혼이 있다, 중도가 있다... 라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자기를 주장하지만... 근거가 없는 주장이라는 사실 조차 인식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류의 지식에 대해서 총체적 무지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며... 사실, 무지를 아는 것이 '올바른 지식' 즉 '진지'라고 말했던... 소크라테스의 '진실된 말,진언'에 대해서 사실 그대로 설명하는 것이며, 사실... 석가모니의 가르침과 예수의 가르침 또한 표현이 다를 뿐...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 그대로 올바르게 본다면... 일념수행으로써 스스로 아는 지혜가 생겨난 인물이며, 인간세상에서 가장 지능이 뛰어난 인물이다. (이런 올바른 설명에 대해서 이해 조차 불가능한 인간이라면... 소크라테스의 말과 같이... 살아갈 가치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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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지식은 왜 쓸모 없는 것인가?
하나. 인류의 역사가 전쟁이듯이... 지식이 많아지는 만큼 민법, 형법 등의 인간들을 구속하기 위한 법이 많아지듯이, 현시대에 불치병, 난치병 등의 질병들이 무수히도 많지만... 스스로 치유할 수 없으며, 남들을 의존한다고 하더라도... 불치병이라는 말이 있는 것과 같이, 스스로 치유할 수 없듯이, 인간들의 지식은 정작 자신을 위한 것도 아니며, 남들을 위한 것도 아니며, 자연을 위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쓸모 없는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여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으로써 악용되는 것이 지식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나'라고 아는 그대의 '이름'에 대해서 '자신'이라고 여기지만... 그 이름을 스스로 아는 것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들어서 아는 것과 같이... 그대의 모든 지식들 또한, '스스로 아는 것'이 아니라 남들을 의존하여 얻어진 것으로써... 자존심, 자만심, 아상만 있는 것일 뿐, 그대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정작 그대 자신에게 이익될 것이 없는 것이 지식이기 때문에... 쓸모 없는 것이라고 단정 짓는 것이다.
지식... 공격하거나, 방어하거나, 회피하는 것으로써... 사실 비겁한 것이며, 자신을 위해서도 쓸모 없는 것이며, 남들을 위해서도 쓸모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디에 쓰기 위해서 지식을 탐하는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지식에 대해서 완전하게 무지한 것이며, 무지몽매한 것이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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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 그렇다면, 올바른 앎... '도, 깨달음, 진리, '중도' 란 무엇인가?
인간들이 어리석어서...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그 옳음이 모두 옳지 않음을 사실 그대로 올바르게 아는 것이 진리이며, 옳지 않음을 사실 그대로 올바르게 앎으로써 서로가 진리라고 주장하는 한 편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중도' 이다.
비유를 든다면...
첫째. 서로가 진리라고 주장하는 종교 나부랭이들에 속하여 투쟁하는 짓들이 가장 무한한 어리석음으로써 중도가 아니라는 뜻이다.
둘째. 서로가 정의라고 주장하는 것들에 집착하지 않는 것으로써... 정치론, 인생론 등의 모든 지식이 무지라는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앎으로써... 확신이 없는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 중도를 지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 자체가 상대적인 것으로써, 인간들의 사고방식 또한 상대적이 아닐 수 없는 것이며... 상대적인 모든 것든 주체가 사라짐과 동시에 대상 또한 사라지는 것으로써... 본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실체가 없는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대의 나... 또한 근본원인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서 추상적으로 정의할 수밖에 없는 이치와 같다. (이미 충분히 설명된 내용이기 때문에 요약하는 것이니... )
사실, 인간의 관념으로써 중도를 이해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 개개인의 '내가 있다'는 사고방식 자체가 상대적인 앎이며, 고정관념화된 생각으로써... 중도의 견해가 아니라, 단견, 편견, 소견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념법, 일념명상법 수행을 통해서 '스스로 자신의 생각의 윤회현상'에 대해서 사실 그대로 깨달아 알아아만, 그때 비로소... '중도'라는 말에 대해서 '사유할 수 있는 지혜'가 생겨나는 것이며, 실행할 수 있는 것이며... 그런 행위에 대해서 '진리와 벗하는 삶'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실 중도를 가장 분명하게, 사실 그대로 설명하는 말이 예수의...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로써, 나와 너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라는 뜻이며,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 또한 그러하며... 싯다르타의 지식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라는 말 또한 같은 맥락으로써, 그대 자신의 마음의 실체를 사실 그대로 올바르게 깨달아 알아야만... 가치 있는 삶일 수 있다는 뜻이며... 사실, 인간들 모두를 동등하게 볼 수 있는 올바른 앎에 대해서 중도에서 본다는 것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그대는...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무지하며, 자신의 몸에 대해서 무지하다. 사실, 자신에 대해서 올바르게 아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그대가 짓지 않은 그대의 이름에 대해서 그대의 '나' 라고 알듯이... 사실 그대가 그대에 대해서 '스스로 아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
자신이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그것은 자신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그런 자신의 인생이 있다는 생각... 어불성설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그렇기 때문에... 진리를 알라고 하는 것이며, 그것이 곧 진정한 자유, 평화이며, 중도에서 보는 지혜라고 하는 것이다.
진리와 인연있는 이에게 영원한 평화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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