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 지성체의 허구

조주선사 어록 / 뜰앞의 잣나무와 끽다거 - 선문답. 선시. 그 무지와 어리석음의 실체

일념법진원 2014. 9. 28. 06:33

어느 날 어떤 학승이 조주 선사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
학승은 다시 물었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위로는 부처로부터 아래로는
곤충,미물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성이 있다 했는데,
어째서 개에게는 불성이 없습니까?"
조주 선사는 대답했다.
"분별하기 때문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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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이런 단편적인 글들만으로써는 그 뜻을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앎 하나는 볼 수 있다.

'분별하기 때문에 없다'는 말이 올바른 말이기 때문이다. 

 

사실 옛 선사라는 중생들의 글들 중에는 참으로 옳은 말들이 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언어가 상대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비유법이 없다는 것이다. 사실. 메뉴의 '인류 스승들의 가르침'에서 옛 선사들에 대한 해석이 빠진 이유는, 개중에는 간혹 올바른 앎에 바탕을 둔 말들이 있으나, '노자의 도덕경'의 내용들과 같이 '언어가 상대적이라는 사실에 바탕을 둔 올바른 비유법들은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세상에  '도'를 전하는 이유는 인간들에게 다툼이나 경쟁, 투쟁, 전쟁이 없는 진정한 자유와 평화로운 삶의 길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알리기 위함이 첫째이며, 물질이나 명예욕 등의 사사로운 욕망으로써는 결코 행복이나 자유, 평화로울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알리기 위한 목적이다. 사실 소크라테스의 말과 같이 '가치 있는 삶, 검증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올바른 앎일때, 비로소 있는 그대로, 삶 자체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삶과 죽음이 없는 이치를 깨달음으로써 어린아이들의 소꿉장난과 같이 근심과 걱정 두려움 없이, 남들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삶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에게 삶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들의 삶은 더 이상 자신을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마조, 조주, 임제 등의 어록을 설명하는 까닭은 그들의 말에 묶여서 말재간을 겨루는 짓 따위에 대해서 '깨달음'이라고 착각하는 어리석은 중생들에게 올바른 길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사실 예전에 어떤 중생이 '법거량을 하자'고 요청한 적이 있었다.

답하기를. "법이 본래 없는 것인데, 거량할 법이 어디 있겠는가" 라고 답변하자.  깨달은 자는 누구의 말이든지 받아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방식이다. 인간들의 사고방식이 그러하다. 도를 닦는 일, 자신의 마음을 이해 하는 일 마져도, 남들과 겨루기 위한 수단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무한한 어리석음의 소치이다. 

자신의 마음의 근원을 찾는 일에 대해서 도. 불도. 불법이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다. 

 

 

사실 올바른 앎이라면.... 불법, 성불, 불성이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우상숭배사상에 찌들어 자신의 마음을 찾는 방법에 대해서 '불법이니 성불이니... 라고 하니. 이미 삿된 길을 가는 자들의 헛소리들이다.  

 

 

"심지어 이사람을 찾았던 어떤 중생은. 수행자는 그러면 안되는 것 아닙니까" 라고 자기를 주장한다. 자신은 수행자라는 것이다. 그러니.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답한다. 할 말이 그것 밖엔 없다.

그대는 수행자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수행자가 아니다, 라고 답할 수밖에...

나는 수행자도 아니며, 나는 부처도 아니다.

더 나아가 나는 사람도 아니다.  

 

 

 


어느 날 또 다른 학승이 조주 선사에게 물었다.
"달마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니라(庭前柏樹子)."
"선사께서는 비유를 들어 말하지 마십시오."
"나는 비유를 들어 말하지 않는다."
"달마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이에 조주 선사는 다시 대답했다.
"뜰 앞의 잣나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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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 앞의 잣나무니라' 라는 말에 대해서 '뜰앞의 소나무' 라고 하니. 머리깎은 중생이 '뜰앞의 소나무가 아니라, 잣나문데요" 라고 반문하더라는 내용으로 글을 쓴 적이 있다. 사실 이런 말들은 다분히 '말재간'에 속하는 말들이다 아닐 수 없다. 물론 옳지 않은 말은 아니지만, 중생들은 이런 말들에 대해서 동문서답하는 말재간들에 대해서 깨달음이라고 착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 말이 옳은 말이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달마대사나 또는 석가모니 같으면, 그 따위 말재간으로써 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올바르게 이해 하는 사람이라면, 아니. 일념을 깨닫기만 하더라도... 석가모니의 방편설 중에 '별은 별이 아니다'는 말과 같이. 사과와 사과라는 글자로써 설명할 수 있을 것이며, 알아들을 수 없다면, 일념법. 일념명상법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뜻이다.

 

 

 

 


하루는 젊은 유생(儒生)이 ---> '선비 유'

조주 선사를 찾아와 손에 들고 있는 주장자를 보면서 물었다.
"부처님은 중생의 원을 저버리지 않는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그렇다."
"저는 스님께서 가지고 계신 주장자를 갖고 싶습니다."
"군자는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을 빼앗는 법이 아니다."
이 말에 유생은 얼른 응수했다.
"스님, 저는 군자가 아닙니다."
유생의 이 기지는 매우 뛰어났다.
그러나 그 기지는 조주 선사의 발 아래 있을 따름이었다.
조주 선사는 유생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한칼에 쓰러뜨렸다.
"나도 부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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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 '나도 부처가 아니다'는 말은 참으로 옳은 말이다.

 

별은 별이 아니다.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나는 나가 아니다.

사과는 사과가 아니다. 는 말로써 '명색의 동일시'의 착각에서 깨어남을 이르는 말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하루종일 기도하여 깨어나라는 말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으로써, 일념법 명상으로써 깨어나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조주 선사에게는
'끽다거(喫茶去)'라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즉 '차나 한잔 마시게'라는 뜻이다.
조주 선사가 자신을 찾아오는 어느 학인을 보고 물었다.
"그대는 이곳을 와본 적이 있는가?"
"처음입니다."
"차나 한잔 들게"
조주 선사는 또 다른 학인을 보고 물었다.
"그대는 이곳을 와본 적이 있는가?"
"예, 전에 왔었습니다."
"차나 한잔 들게"
이때 한 스님이 물었다.
"선사께서는 어째서 이곳에 왔던 사람이나,
처음 온 사람에게 차
나 한잔 들라고 하십니까?"
이 말에 조주 선사는 그 스님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네도 차나 한잔 들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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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학인에게 했다는 말이다.

사실 그져 지적 호기심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일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아니다.

찾아오는 사람이 누구든지, 그들은 자신의 마음을 알고 싶거나, 또는 그져 심심풀이삼아 찾아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차라리 그런 말들 보다는, 좀더 삶에 대한 지침을 주는 편이 더 낫지 않겠는가?

예를 든다면, 어제 올려진 '사색가'의 말들이나, 또는 그의 인삿글들에서도 그런 말을 볼 수 있다.

가령. 잔소리 하지 말자는 말이다.

자기를 주장하지 말라는 말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인생에 있어서 해답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누가 감히. '내가 인생의 해답을 안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말이다.

 

올바른 앎이 아니라면, 입 다물라는 말이며, 이와 같은 뜻의 다른 표현들이 '침묵이 금이다'는 말이다. 벼가 익으면 익을 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 또한, 올바르게 아는 사람은 나서지 않는다는 뜻이며, 올바른 앎일때, 그때 비유를 들어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이다.

 

사실 차나 한잔 하시게' 라는 말은 올바른 비유가 아니라, 인간들의 공통적인 공격이나 방어 회피 성향들 중에서 회피하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조주 선사는 어느 날 대중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의 이 모임에는 굴 안에 있는 사자도 있다.
그런데 사자 새끼만 없구나."
이때 어떤 스님이 일어서서 손가락을 서너 번 튀기니
조주 선사가 물었다.
"왜 그러는가?"
"사자의 새끼입니다."
이에 조주 선사가 말했다.
"내가 사자 새끼라고 한 말이 이미 잘못된 것인데,
자네가 다시 발길질을 하니 무슨 쓸모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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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끝없이, 끊임없이 다른 생각을 낳는 것이며, 말 또한 그러하다.

이런 말재간들로써 겨루기에 습관이 되다 보니. 선문답이라는 말, 법거량이라는 말, 인가 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만약에 석가모니라면, 인가 따위를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어찌 자신의 나를 아는 앎에 대해서 타인들의 인가를 받아야 하겠는가?

어리석은 중생들이 법거량을 통해서 '인가'를 받는다는 말이 있다.

그대가 사람이라고 알면 그만이다. 그런데 그대가 '나는 사람이다' 는 앎에 대해서 남들에게 인가를 받아야 하겠는가말이다. 

 

도를 깨닫는다는 것 또한 이와 같다는 뜻이다.

자신의 나를 아는 앎, 즉 '너 자신을 알라'는 말과 같이 자신의 나의 근본원인을 아는 앎에 대해서 깨달음이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다. 자신의 나를 아는 앎에 대해서 어찌 남들의 인가를 받아야 하겠는가? 그러니 어리석은 중생들의 말재간이라고 하는 것이다.

 

 

 

한번은 초심자가 조주 선사를 찾자와
겸손한 자세로 말했다.
"빈손으로 왔습니다."
"그러면 내려놓게."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을 내려놓습니까?"
"그럼 계속해서 들고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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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할 가치도 없는 말재간들이다.

다만, 올바른 앎을 듣기 위해서는 자신의 지식 따위는 접어 두라는 말로 이해 할 수 있기를....

 

 



그의 제자 가운데 한 명이 죽었을 때였다.
방장인 조주 선사도 그의 장례 핼렬에
참가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많은 죽은 사람이 한 사람의
산 사람을 쫓아가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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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이런 말을 가치 있는 말로 본다면.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 그렇지 않은 삶이라면 살아갈 가치가 없다'는 말과 같은 뜻으로써 살아 있으되 쓸모 없는 것이라는 말로 볼 수 있으며, 차라리 죽은 자가 더 낫다는 말로 이해 될 수도 있는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들의 삶이라는 것들 모두가 서로가 경쟁, 투쟁, 전쟁을 위해서 사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도를 공부한다는 자들 또한 서로가 말재간들로써 지식을 겨루는 형국이니. 쓸모 있는 것들이 없다는 뜻이다. 무용지용이 아니라 무용지물이라는 말이며, 가치 있는 삶을 살라는 말로 이해 한다면,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이다.

 

 

 

어느 날 한 스님이 조주 선사의 초상화를 그려서
선사에게 바쳤다.초상화를 받은 조주 선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나의 모습이라면 그대는 나를 죽일 수 있을 걸세.
그러나 그렇지 않으니 밖에 내다가 태워 버리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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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은 참으로 공부하는 선사, 수행자 다운 말이다.

왜냐하면, 거울에 비치는 그것이 나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자신의 모습을 그린 그림 따위에 집착해서 되겠느냐는 말로 이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할 말은.

노자의 도덕경의 해석과 같이 깨달은 자는 '다듬지 않은 통나무와 같다' 는 말이다.

겉치레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며, 부와 명성을 위해서 뛰어다니지 않는 한가한 사람이라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참선하는 어떤 스님이 조주 선사에게 물었다.
"스님, 가장 다급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선사는 다급하게 일어나며 말했다.
"오줌 좀 눠야겠다.이런 사소한 일도
이 늙은 중이 직접 해야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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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말 또한 우스게 소리 쯤으로 여길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욕망의 노예가 되어버린 인간의 무한한 어리석음을 꼬집는 말이기 때문이다.

지구가 멸망하든 말든, 세월호가 침몰하든 말든... 그대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세상사가 아니라, 자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뜻으로 이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어리석어서 욕망에 눈이 멀어, 몸을 함부로 하여 건강을 해치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돈이나 명예 보다도 그대 자신의 건강이 우선이라는 뜻이며, 그 뜻을 올바르게 이해 한다면... 일념수행으로써 자신의 나를 아는 앎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으로 이해 한다면...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이다.

 

 

 

한 스님이 조주 선사를 찾아왔다.
"저는 공부한 지가 얼마 되지 않습니다.
큰스님께서 잘 지도해 주십시오."
이에 선사는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아침 먹었느냐?"
"예."
"그럼 어서 가서 밥그릇이나 씻어라."
하루는 어떤 스님이 조주 선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어떤 것이 조주입니까?"
조주 선사가 대답했다.
"동문도 있고,서문도 있고,남문도 있고,북문도 있다."

조주 선사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오래 전부터 스님의 돌다리에 관해서 들었습니다만
와서 보니 통나무 다리만 보이는군요."
조주 선사가 말했다.
"너는 통나무 다리마 보고 돌다리는 못 보는구나."
"어떤 것이 돌다리입니까?"
"당나귀도 건너고,말도 건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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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없는 말이니. 넘어가자.

 

 

 


조주 선사가 그의 시자
문원(文遠)과 못나기 내기를 한 적이 있다.
문원이 먼저 조주 선사에게 말을 하라고 하자
조주 선사가 입을 열었다.
"나는 한 마리 나귀와 같다."
문원이 말했다.
"저는 그 당나귀의 다리와 같습니다."
선사가 화답했다.
"나는 나귀 똥이다."
문원이 말했다.
"저는 그 똥 속의 벌레와 같습니다."
선사가 물었다.
"너는 똥 속에서 무엇을 하려느냐?"
문원이 대답했다.
여름 안거를 지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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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  없는 말재간들이다.

왜냐하면 이런 말장난들로써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석가모니나, 달마대사라면, 그 따위 말재간을 부릴 수 있겠는가? 

무식하고 어리석은 하근기 중생들의 말재간들이다.

 

 

 

 

어느 화창한 날 스승님께서

토굴에서 유체이탈하셔서 제자들을 데리고

중국 조주선사에게로 가셨다.

조주선사: 어서 오십시오.

수행에 여념이 없을텐데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스승님: 수행이 가고 오고가 없는데 무엇이 따로 필요하단 말씀입니까?

조주선사: 태양이 내리 비치나, 그 빛을 보는 사람도 있고, 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스승님: 눈을 뜨고 있는데 봉사도 있으며, 눈을 감고 있는데 천리안을 보는 자도 있소.

조주선사: 빛은 빛이돼 빛이 아닌 것은 무엇입니까?

스승님: 나고 죽음이 있으돼 영원히 사는 것은 무엇이요?

조주선사: 깨달음은 어디 있으며, 또한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스승님: 내가 나고, 너는 너다.

조주선사: 한꺼번에 깨치는 것이 낫겠습니까? 서서히 깨치는 것이 낫겠습니까?

스승님: 깨침도 없으며, 깨치지 못한 것도 없소.

조주선사: 바람앞에 등불이라는 것이 있는데, 등불이 바람앞에 존재 합니까?

바람이 등불앞에 존재 합니까?

스승님: 내가 아는 것이 다입니까?

내가 모르는 것이 다 입니까?

조주선사: 우리라는 통념상의 이야기가 어디까지 입니까?

스승님: 너와 나가 없는데, 어떻게 우리가 있겠소.

조주선사: 수행의 방편은 무엇입니까?

스승님: 어제 냇가로 나갔더니, 물과 바람이 있어, 내 마음을 날려 보냈소.

조주선사: 바람은 바람이고, 물은 물인데,

어디로 왔으며, 어디로 갑니까?

스승님: 가고 오고가 없는데, 방향이 있을리가 있겠소?

조주선사: 나의 깨닫는 경지가 어디에까지 이르러야 부처님의 경지를 볼 수 있습니까?

스승님: 내가 납니다.

조주선사: 세월이 무상하다 하여, 만물이 무상으로 흘러가고 있지만,

이 세상에서 무상하지 않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스승님: 태어남과 죽음도 모르는데, 내 어찌 알겠소.

조주선사: 깨침이 눈앞에 있는데, 그 경계가 어디까지 있습니까?

스승님: 깨침을 안다는 것이 경계요.

또한 모른다는 것이 경계요.

조주선사: 스승님께 큰 예를 올리며,

제가 수행함에 있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수행하고자 노력했건만

오늘에야 이르러서야 비로소 내 상속에 내가 빠진 것을 알았습니다.

부디 자주 오셔서 많은 가르침을 주시고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여 주십시오.

스승님: 가르침의 세계란 끝도 없고 시작도 없는데, 어찌 주고 받음이 있겠소.

허나 그 신심을 잘 키우고 불심을 키운다면, 인연법에 의하여

때가 되면 부처님의 세계를 볼 수 있을 것이요.

조주선사; 스승님께 천수차(하늘의 물로 끓인 차)를 내어 놓으시며,

감사히 예를 올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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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나와 너'가 없는데, 어찌 우리가 있겠소... 라는 말은 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런데.

께닫는 경지에 대해서 물으니...'내가 납니다' 라는 답변... 신비한 말이 아니라, 어리석은 자들의 뜻도 없는 말재간들이다. 왜냐하면... 부처의 경지를 논한다는 말 자체가 어긋나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의 본성을 깨닫는 일에 대해서 불법이라고 하니... 그 자체가 모순이

 

위. 신심을 잘 키우고 불심을 키운다면... 부처님 세계를 볼  수 있다는 말... 이 역시 어리석은 자들의 괴변이다. 왜냐히면 사실. 석가모니는 그것에 대해서 '불타니라' 라는 말을 했을 뿐, '불성, 성불' 등의 말은 석가모니가 만든 말이 아니라, 석가모니의 말이 우상숭배사상으로 조작하던 자들에 의해서 가공된 말이기 때문이다. 

 

부처님 세계라는 말 또한 무지한 자들의 소견이다. 

'성불하겠다는 말, 불성을 보겠다는  말' 그 자체가 이미 어긋난 말이라는 뜻이다. 

 

겨자씨 만큼이라도 올바른 앎이라면. 그 법, 방법은 '네 마음의 근본원인'을 찾는 일이니. 그 방법에 대해서 설명해야 마땅한 것이다. 

 

무상삼매라는 말 또한 '無相' 이 아니라, 無想'으로써 생각이 끊어진 삼매라는 말이 옳은 말이다. 

 

깨달음이란, 자신의 마음의 근원을 본다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마음이 생각에 불과한 것이 때문이며, 생각의 원리에 대해서 깨닫기 위한 것이다. 

 

사실. 인간들의 '신경통'이라는 말의 뜻을 보니. '귀신 신' 자와 '지날 경' 자로써 귀신이 지나간 자리라는 방식으로 이해 하는 것 같다. 사실. 신경이라는 말은, 본래 '생각의 작용'을 일컷는 말이다. 

 

사실.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에게는 신경통이 없으며, 스스로 몸을 완전하게 치유할 수 있는 권능이 있다. 어제 모임에 왔던 인물들... 서울에서 온 사람들과 화원, 여등, 사색가, 미래소년 코난... 그들 모두가 '단식'과 '도가의 약식'으로써 완전한 건강을 되찾은 인물들이다. 

 

그들만이 이해 할 수 있는 말이 있는데, 몸이 유기체이며, '생각의 환상물질'이라는 말에 대해서 올바르게 아는 앎이다. 

 

'도' 를 이해 한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이해 한다는 뜻이다. 

자신이 모르는 자신의 마음. 그것이 '일체유심조의 더 깊은 뜻'의 설명과 같이. 모든 것이며, 또한 모든 것의 기원이기 때문이다. 

 

그대와 인류에게 평화 있기를. 

 

일념명상의 집 '도가' ---> http://blog.daum.net/powwr116/?t__nil_login=mybl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