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제가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평생 동안 저는 깨달음을 찿아 다녔습니다. 그리고 깨달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어떤 사람이 깨달았는지 그렇지 않는지 하는 물음조차 들지 않았습니다.
기원전 6세기의 붓다를 비웃을 생각은 아닙니다.
하지만 요즈음 스스로 깨달았다고 하는 이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을 이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인간의 외부에 존재하는 힘은 없습니다. 인간은 두려움에 의해 신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신이 아니라 두려움입니다.
저는 깨달아야 할 자아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말하는 깨달음입니다. 그것은 강렬한 일격이었습니다. 마치 벼락에 맞은 듯 했습니다. 자아를 찿기 위해 그토록 애썼는데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빌어먹을, 이제껏 무슨 짓을 했지?" 그 순간 '나' 라는 것이 폭발해 버렸죠.
갖가지의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육체적인 고통은 참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그 한 조각을 살짝 맛보게 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다시는 이것을 원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찿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저 신화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것은 깨달음이 아닙니다.
선생님에게 일어난 그 일은 무엇입니까?
글쎄요, 뭐라고 해야 할지......, ' 해탈' 이나 '깨달음', ' 자유', '해방' 이런 단어들을 쓰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 단어들은 저마다 함축적 의미를 지니고 있죠. 이것은 노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저 일어나죠. 그리고 왜 어떤 사람에게는 일어나고 어떤 사람에게는 일어나지 않는지 저는 모릅니다.
선생님에게 그 일이 일어났습니까?
일어났습니다.
어났습니다.
언제였습니까?
마흔아홉 살 때였습니다.
우리는 진리나 궁극적인 실체를 찿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노력이 우리를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상태' 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습니다. '자연스러운 상태'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노력의 결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그래서 저는 '우연' 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원인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어쨌든 찿아다니는 일은 끝이 났습니다.
그것은 찿아다닌 결과는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하지만 선생님은 철학을 공부하기도 했고 영적인 스승들과 만나기도 하셨는데요.
찿아다니는 것은 우리를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반대 방향으로 가게 하죠. 찿아다닌다고 찿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찿아다녔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이 일어난 것이군요. 찿아다녀서가 아니라.
찿아다녔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요, 그 말이 적당하군요. 이것은 우리의 '자연스러운 상태' 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 상태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찿아다닙니다. 얻으려고 노력합니다. 바로 그 노력이 자연스러운 상태가 드러나는 것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찿으려는 노력은 언제나 반대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우리가 심오하고 경건한 것으로 여기는 모든 것들이 의식에는 오염 물질입니다. 여러분은 아마 이 오염 물질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군요. 그렇지만 여러분이 성스럽다고 여기는 것, 심오하고 명상적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은 다 의식을 오염시키고 맙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저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 일'이 저에게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을 도울 수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줄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여러분들이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제가 줄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은 가지고 있는 것을 찿아 헤매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죠. 그것은 느끼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알고 모르고의 문제도 아니죠. 이것은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저 그것이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저에게 ' 그 일' 이 일어났다는 의식도 없습니다.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저는 한 번도 제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그랬습니까?
아니죠,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무엇인가를 찿아다녔죠.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자라난 다른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찿아다니고 추구했습니다. 그러니 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쉽지 않군요. 제가 살아온 이야기를 처음부터 해야 할 테니까요.
소년 나치케타스 ( 나치케타스 와 야마 다르 마라자 ; 카타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이야기. 호기심 많은 소년 나치케타스는 죽음의 신 야마 다르 마라자에게 죽음의 의미를 묻는다. 죽음의 신 야마는 세속의 부 와 쾌락을 약속하며 질문의 철회를 요구하지만 나치케타스는 오직 죽음의 의미만을 알고 싶어한다.) 처럼 호기심 때문인데요. 선생님에게 어떻게 그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합니다.
아주 긴 이야기라서 짧게 이야기할 수가 없군요.
긴 이야기라도 듣고 싶습니다.
제가 살아온 이야기를 모두 해야 합니다. 아마 굉장히 오래 걸릴 거예요. 저의 인생이 한 점으로 모아졌고, 그리고 멈추었습니다. 그 이후로 개인사가 없죠.
저의 전기를 쓰려는 전기 작가가 있습니다. 그는 제가 해 온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제가 행하던 영적인 수행법이나 받아 온 교육, 그리고 그 밖의 살아온 이야기에 관심이 있습니다.저를 그 곳에 묶어 두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에도 불구하고 이 일이 일어났다고 했는데 말입니다.
'불구하고' 일어난 지금의 상태에는 아무래도 관심이 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책 한 권을 쓸거리가 없기 때문이겠죠. 그는 책을 만들어 내는 데 더 흥미가 있습니다. 편집자들도 이야깃거리에 관심을 기울리죠.
세상은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원인에 흥미를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겨났는지 그 원인을 알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처음에 서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는군요. 여전히 '어떻게'에 관심이 있습니다.
저의 개인사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것은 누가 따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개인사는 유일무이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 자신의 방식대로 특별한 것입니다.
받은 교육이나 자라 온 환경 그 모든 것들이 저마다 다릅니다.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다르죠.
세상 사람들이 따라야 할 길을 제시해 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의미에서 질문을 드린 것이 아닙니다. 저희는 별을 보고 태양을 보고 달을 봅니다. 그저 그런 식으로 말입니다. 선생님을 모방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어떤 사람에게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죠. 저는 나치케타스가 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려주시기 전까지는 이 곳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그 질문의 대답을 듣기 위해서는 야마 다르마자가 필요하겠는데요.
저를 위해 야마 다르마라자가 되어 주시죠.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만 글쎄요, 어디에서 끝나는지는 알겠는데 어디에서 시작해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제가 살아온 모든 이야기를 다 해야겠는데요.
듣고 싶습니다.
생각이 나지 않아요.
영감이 떠올라야 합니까?
그런 것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영감을 주지도 않죠. 호기심을 채워 드리기 위해 제 인생의 거짓된 부분을 이야기해야겠군요.
(그는 1918년 7월 9일 남부 인도에서 태어났다. 중상류 브라만이었던 그의 성은 우팔루리, 이름은 고팔라 크리슈나무르티이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외조부모가 마술리파탐 부근의 작은 마을 구디바다에서 그를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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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지금 여기에' 라는 말로써 사람들을 현혹하는 자들이 있다기에 검색하다 보니... 위의 글이 있기에 옮겨 보았다.
물론 일념법 일념명상법으로써 자신의 마음의 실체를 깨달아 알기 시작한 수행자들을 위해서이다.
위의 내용들 중에서...
기원전 6세기의 붓다를 비웃을 생각은 아닙니다.
하지만 요즈음 스스로 깨달았다고 하는 이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을 이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인간의 외부에 존재하는 힘은 없습니다. 인간은 두려움에 의해 신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신이 아니라 두려움입니다.
저는 깨달아야 할 자아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말하는 깨달음입니다. 그것은 강렬한 일격이었습니다. 마치 벼락에 맞은 듯 했습니다. 자아를 찿기 위해 그토록 애썼는데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빌어먹을, 이제껏 무슨 짓을 했지?" 그 순간 '나' 라는 것이 폭발해 버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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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6 세기의 붓다를 비웃을 생각은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만약에 붓다를 비웃을 생각이 없다면, 예수나 석가모니 또는 노자는 비웃을 수 있다는 말일까? 아니면... 오직 자신의 깨달음만이 옳다고 주장하고 싶어하는 것일까? 사실 '오쇼- 라즈니쉬'와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오쇼'라는 중생은 '영혼은 과학이 밝힐 것이다' 라고 하는 어리석음인 반면에 '유지'의 말은 '신은 인간들의 두려움의 산물이라는 말로 본다면, 오쇼보다는 조금 더 언술이 뛰어난 자인 것은 분명하다.
사실. '자아를 찾기 위해서'... 라는 말이 이미 어긋난 말이다.
'깨달아야 할 자아가 없다'는 말 또한 언술이 뛰어난 자의 말재간이다. 오쇼라는 자와 같이 그보다 더 괴이한 행동으로써 남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한 발상이니, 인간들의 욕망에서 비롯된 천태만상으로 드러나는 어리석음의 최상급인 것 같다.
'하지만 요즈음 스스로 깨달았다고 하는 이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을 이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라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아마도 오쇼-라즈니쉬를 비롯하여 소위 동남아에서 스스로 구루, 스승이라는 자들의 행태를 보고 하는 말인 것 같다. 물론 자신 또한 같은 부류라고는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최소한 '깨달음' 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리하여 노자의 가르침이나, 석가모니, 예수의 가르침의 본질에 대해서 다만... 지적으로나마 이해 할 수 있는 자라면... 그런 방식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소위 명색이 철학자라라면, 어찌 노자를 모르겠으며, 소크라테스를 모를까?
소크라테스의 말 조차 이해 할 수 없는 자라면... 어찌 깨달음을 말할 수 있겠는가?
허긴 이 나라에만 하더라도 스스로 깨달았다는 자들은 무수히도 많은 것 같다. 만약에 그런 자들이... 소크라테스의 '유일한 선은 올바른 앎이며, 유일한 악은 지식'이라는 말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다면... 그나마 지식으로써는 위없는 최고급 지식일터이니... 인문학자로써는 가치 있는 자일 수 있을 것이다.
강렬한 일격이었다, 마치 벼락에 맞은 것 같다는 말... 어리석은 중생들이라면 충분히 속을 수 있는 말이겠지만...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이라면, 빙긋이 웃어버릴 수밖에 없는 말이다. 왜냐하면, '육체가 나다'는 생각과 '육체가 나가 아니다'는 생각은 단지 한 생각의 차이일 뿐이라는 사실에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말을 옮기지 말라, 언술이 뛰어나서 나의 말을 옮기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적이다'는 예수의 말, 그리고 석가모니의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라는 말의 뜻이 곧 언술이 뛰어나서 '깨달음'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있다, 없다'는 방식으로 주장하는 어리석은 자들이며... 도, 깨달음의 가르침으로 본다면... 선의 적이며, 가장 악한 무리들인 것이다.
물론 깨닫고 나서 본다면... 근본원인은 '본래무일물'이다.
'나' 가 없다면...'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석가모니의 '무고집멸도' 라는 말과 같은 뜻이기 때문이다.
일념법 일념명상법이 진리이다.
왜냐하면 무지의 문을 여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일념명상의 집 '도가' 에서 ---> http://blog.daum.net/powwr116/?t__nil_login=my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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