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내마음이 내마음이 아니다'라고 하면... 누구나 웃어버릴 수밖에 없는 일이다.
사실 '내마음이 내마음이 아니다'는 말이 이곳 글들의 요점이지만... 지식으로써는 어불성설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기 때문에 '깨달음'이라는 말에 대해서 까지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는 세상이다.
사실.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만이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있는 말이며, 이곳 글들로써 삶의 위한을 삼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지적 이해는 가능한 말이겠지만, 여타 종교들이나, 또는 여타 각종 명상집단들에 세뇌 당한 광신자들이나 맹신자들에게는 여전히 우이독경이거나, 마이동물과 같은 말들일 수밖에 없다.
사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음이 확고부동하여 항상 편안한 사람'은 있을 수 없다.
사실. 인간세상이 있다고 본다면, 가장 추잡하거나 가장 비천하거나,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델레비젼에 나오는 사람들이거나 신문지상이나, 인터넷 세상에서서 제 잘난체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 모두가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명예, 명성에 집착하는 사람들이며, 재물을 탐하는 사람들이거나, 재물이나 명성 때문에 감옥을 들락거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잘난체 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돈을 준다면, 그것이 무슨 약인줄도 모르고, 그것이 독약인지, 좋은 약인지, 좋은 음식인지도 모르고... 주절주절 사실인냥 얼굴을 팔고, 이름을 파는 짓들을 일삼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보다 더한 것들이 소위 '내가 깨달았다'며 주절거리는 자들이며, '내가 하나님이라고, 내가 진리라고, 내 가족들이 모두 하늘에 있다고... 심지어 과학명상이라고, 뇌를 씻는다고 주장하는 자들 모두가 그러하다.
더 나아가 노자를 해석한다는 자들, 인문학이 옳다고 주장하는 자들 또한 그러하며, 서로가 진리라고 주장하는 자들 또한 모두가 그러하다.
만약에 그들이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겨자씨 만큼이라도 이해 할 수 있다면.... 참으로 창피스러운 일이겠지만...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 이해 조차 불가능 한 어리석은 자들이기 때문에 무지몽매한 것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다.
아마도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이라면... 그런 허무맹랑한 짓들에 이끌려 다니지 않을 것이며, 차라리 마음 편한 쪽을 선택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욕망에 눈이 어두워 얻은 만큼 더 큰 고통을 감내 해야 하기 때문이다. 최소한 일념을 깨달아서 아는 올바른 앎이라면... 직업에 상관 없이 스스로 평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며, 더 나아가 삶과 죽음의 한계를 벗어나 무위자연의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인긴은 누구나 '내마음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사실 내마음이 있다는 앎은 '내마음이 없다'는 앎과 상대적인 앎으로써 '내마음이 없다'고 주절거린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의 말에 속아서, 최면에 거린 것처럼 그렇게 주절거리는 것일 뿐, 고통을 똑 같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고자 하는 말은.
도대체 내 뜻대로 될 수 없는 '내마음'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이며, 왜, 내마음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인지에 대해서 사유해 보라는 뜻이다.
올바른 사유란, 석가모니의 말에 대해서 사유하는 것이 아니며, 예수의 말씀이라는 말에 대해서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마음의 형성과정에 대해서 사유한다는 말이다. 물론 어린아이들이 말을 배우고 익히는 과정을 통해서 지적으로써도 이해는 가능한 말이다.
옛날에는 세살버릇 여든 간다는 말이 있었는데, 현시대에는 두살버릇이 여든간다는 말로 바뀌었다는데, 그만큼 어린아이들 또한 영악해진 결과이며, 어른들에 의해서 그렇게 배운 결과이다. 앞서 '사색가'의 덧글을 보니. 아이들에게 '인간 또한 본래 동물이었다'는 말에 대해서. 아이들이 반기를 들더라는 말이 있었는데. 사실 그 어린 아이들 또한 말을 배우기 이전에 대해서, 말을 배우는 과정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말을 배워서 말을 익히기 전에는 '내가 있다, 내가 사람이다'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없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상상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 아이들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절대로 동물과는 같을 수 없다. 나는 짐승들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다 라는... 다른 사람들에게 배웠던 말, 말, 말들에 대해서 사실적이라고 단정짓는다는 것이다.
요즘에는 서너살 된 아이들까지도 '마음이 아퍼' 라고 한다. 그 아이들 또한 마음이 무엇인지 모른다. 일념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 또한 마음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 아이들과 다른 것이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만약에 그 서너살 된 아이들... '내 마음이 아퍼'라고 말하는 아이들과 지식이 풍부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의 앎의 차이가 있다면.... 특별한 차이는 없다. 다만, 그 아이들보다 더 많은 말, 말, 말들이 기억세포에 저장되어 있는 것 뿐이다.
서너살 된 아이들의 기억세포에 저장된 낱말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림책을 보고 배워서 아는 낱말들과, 엄마, 아빠, 선생님, 맛있는 것, 맛이 없는 것, 빵, 과자, 케익, 라면... 등 등일 것이며... 아마도 그 아이들에게 '라면'이 뭐야? 라고 물어보면... 응 꼬불꼬불하고 맛있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그 아이들에게 그럼 '국수'가 뭐야? 라고 묻는다면... 국수를 먹어보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이름이 국수라는 말을 배우지 않았다면... '몰라' 라고 할 것이다. 명색의 동일시가 이제 막 시작된 것이다.
물론 그 아이들에게. '감정'이 뭐야, 라든지.
'느낌'이 뭐야, 라든지... '지식'이 뭐야 라고 묻는다면... '몰라' 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 아이들이 '마음이 아파'라고 말을 한다는 것은, 단지 아빠와 엄마의 언어와 행위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 그럴 것이다' 라는 생각의 표현이 곧 언어이며, 명색의 동일시이며, 지식이다. 사실. 앵무새 또한 '나는 마음이 아파'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앵무새의 말과 아이의 말, 그리고 스스로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는 '마음'이라는 말에는 사실상 아무런 차이기 없다. 왜냐하면, 앵무새도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말을 흉내내는 것이며, 아이들 또한 마음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모르지만 말을 흉내내는 것이며, 사실 어른들 또한 마음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이해 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까지의 설명에 대해서 무엇을 이해 할 수 있겠는가?
물론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이라면... 마음이 생각에 불과한 것이며, 그 생각은 어린아이시절부터 타인들로부터 들었던 말, 말, 말들의 유기적인 생각의 장용에 따른 조합들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일념을 깨닫지 못했다면 마이동풍격이거나 우이독경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일념을 깨닫기만 하더라도, 석가모니의 말과 예수의 말,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말과 노자의 말이 똑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할 수 있으니... 어찌 우상숭배 사상따위에 속아서 서로가 진리라고 싸움질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지식에 대해서 무지이며, 무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실.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할 수 있다면... 내마음은 본래 내마음이 아니라, 아이들과 같이 앵무새가 말을 배워서 아는 것과 같이... '내마음'이라는 것 또한 본래 내마음이 아니라, 타인들의 말, 말, 말에 의해서 가공되어진 것일 뿐,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고 아는 앎이 올바른 앎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진정한 사유이다.
그런 생각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생각할 사' 자와 '생각할 유' 자로써의 '사유'이다.
이런 방식의 사유를 통해서 분명한 이해가 다가온다면... 일념법으로써 그 실체를 스스로 깨달아 알 수 있다는 말이며, 그런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깨달아 안다면, 어찌 마음이 불편할 수 있겠느냐는 뜻이다.
달리 인생에 해답을 구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어찌 해답을 구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구하라 그러면 구해질 것이며,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니.... 라고 했던 인물이 예수이다. 석가모니 또한 '무상한 것은 나가 아니니, 그것을 관찰하라'는 말이 가르침의 요지이며, 이 말은 또한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의 본래의 뜻이다.
사실 일념법을 위한 기초 상식에 대당되는 말이며, 도가의 '화원'의 강의 내용들 또한 이와 같은 맥락으로써 '언어의 상대성'과 함께 '명색의 동일시'에 대한 비유설명들이다. 일념문구들 또한 이런 기초상식에 바탕을 둔 말들로써 일념, 즉 한생각에 몰입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한 것이다.
다만 지적으로나마 이해 할 수 있다면, 올바른 사유로써 마음의 허구성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며, 더 나아가 일념법으로써 사실을 사실 그대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이 있다는 주장도 올바른 앎이 아니며, 마음이 없다는 주장 또한 상대적인 말이기 때문에 올바른 앎일 수 없다. 하지만... 마음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타인들의 말에 의해서 가공된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이해만으로써도... 마음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바탕을 확립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이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할 수 있다면, 그대는 현자이다.
비로소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바탕이 확립된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일념법, 일념명상법으로써 그런 사실에 대해서 스스로 확인할 수 있다면... 검증된 삶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삶과 죽음 또한 상대적인 말, 말, 말일 뿐,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니.
그대여, 벗이여.... 깨어나라.
진리로. 새생명으로 거듭나라.
일념법이 진리이다.
그대와 인류에게 영원한 평화 있기를.
일념명상의 집 '도가' 에서 ---> http://blog.daum.net/powwr116/?t__nil_login=my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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