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나, '내가 생각할 수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 생각한다.
사실 인간들의 '내가 생각한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이런 말에 대해서 '어불성설'이라고 하는 것 같다.
사실. 인간들의 '내가 생각한다, 내가 생각할 수 있다'는 말에는 한계가 있으며, 사실적인 말이 아니라, 거짓말이 아닐 수 없다. 만약에 그대가, 이 들을 통해서 그런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다면, 그대는 최고의 지성체일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하근기 중생이거나, 길잃은 어린 양새끼에 불과하다.
사실. 지성체는... '내가 생각한다, 내가 생각할 수 있다'는 앎(지식, 말)이 얼마만큼이나 터무니 없는 생각인지 조차 상상할 수 없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언술이 뛰어난 자들의 말에 대해서 '연구하고, 고뇌' 하지만... 사실. 그런 말들이 가치 없는 말이며. 쓸모 없는 소모전일 뿐, 인간의 삶에 있어서는 전혀 쓸모 없는 말로써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조차 할 수 없는 것이 소위 지성체들이며, 지식을 주장하는 자들이다.
그런 주장들 따위로써 행복하거나, 평화롭거나, 먹을꺼리를 구할 수 있다면 무용지용이겠지만... 쓸모 없는 논쟁일 뿐이기 때문에 무용지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실. 일념법, 일념명상법으로써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이해가 가능한 인물들,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만이 이런 말들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말들로써 기쁨을 함께 할 수 있겠지만... 여타 지성체들에게는... 우이독경이 아닐 수 없거나, 마이동풍과 같을 것이다. 하지만, 인연있는 자라면.... 그 길을 가라는 뜻이며, 그 길을 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알리는 것이다.
지식이 허구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의 지식으로써도, 지적으로써도 분명히 이해 할 수 있는 말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하기를.... 너희도 그런 지식을 얻고 싶다면, 가르쳐 줄 수 있다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자. 그대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그 생각에 대해서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자.
그대가 그대의 생각을 그대 스스로, 그대의 마음대로 행위하도록, 실행시킬 수 있다면.
'내가 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내가 죽고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야 한다.
사실은 삶이 삶이 아니라, 죽음에 다가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대는... 지금 '나는 산다' 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지금 나는 죽었다' 라고 생각할 수 없다.
사실. 죽는다는 생각이나, 산다는 생각은, 단지 한생각의 차이이다.
즐겁다는 생각이나, 고통스럽다는 생각 또한 한 생각의 차이이다.
만약에 생각이 자신의 '내것'이라면... 그것이 어떤 생각이거나, 자유롭게 하거나, 말거나 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내것이다, 내생각이다, 내몸이다, 내마음이다' 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대의 '내생각'이 전짜 '내생각'이라면... 왜, '내가 신이다, 내가 하나님이다, 내가 절대자다' 라고 생각할 수 없겠는가말이다. 기분이 좋다고 생각하든, 기분이 나쁘다고 생각하든.... 그것 또한 다른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그대의 그대만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내가 죽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며, 내가 부처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며, 내가 영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산다고 생각하든, 죽는다고 생각하든... 상관 없지 않겠는가? 생각이 그대의 생각이라면... 무슨 생각인들 할 수 없을 까닭이 없지 않겠는가말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그대의 생각이, 정녕 '내생각'이 맞는지.... 사유해 보라는 뜻이다.
사실. 인간들의 자기를 주장하는 어리석음이 이와 같다.
어떤 삶이 잘 사는 삶이며, 어떤 삶이 못사는 삶인지... 그 것 조차 분명하게 정의 할 수 있는 자가 없으며, 심지어 자유라는 말의 뜻 조차 서로가 자기의 생각이 옳다고 주장한다.
어떤 것이 구속이며, 어떤 것이 자유인가?
만약에 인간에게... 조그만큼이라도 자유의지라는 것이 있어서, 생각을 자유롭게 실행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는 항상 '나는 행복하여 평화롭다'는 생각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며, 항상 나는 자유를 즐긴다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만약에 인간이 '내생각이며, 내마음이다'고 주장하려한다면, 내컴퓨터를 실행 시키듯이.... 내생각을 실행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럴 수 있다면... 굳이 신. 절대자에게 구걸하지 않을 것이며, 내가 절대자다 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렇지 아니한가?
말도 안되는 소리인가?
그대의 생각이 누구의 생각인가?
'내생각'이라고 주장하질 말든지,,, 내가 생각할 수 없는 생각이라고 주장하진 말든지....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는... 줏대없는 사람인가? 소견머리 없는 사람인가? 주관이 없는 사람인가?
그렇다면, 그대는 누구인가?
만약에 인간이 자신의 과거에 얷매이지 않는다면, 어찌 현제가 있을 수 있으며, 미래에 대해서 상상할 수 있겠는가? 사실. 과거에 행복이나 평화로움을 경험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더 나은 미래를 향해서 열심히 달려 나가지만, 그리고 부지런히, 열심히 달려 왔겠지만... 지금 이순간이 곧 그대가 추구하던 최후의 미래이다.
지금, 지금, 지금.... 지금 이 순간이 살아온 날들의 마지막 날이며, 마지막 미래, 최후의 미래이며, 지금 그 최후의 미래에 있는 것이다. 다른 미래가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사실은 미래를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의 생각들 속에 있는 미래를 향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만들어 나가고 있을 뿐이다. 지금, 지금, 지금... 이 순간순간.... 지나간 과거와 같이 또 다른 과거를 쌓아가는 중이며... 지난 과거와 조금 다른 과거, 더 많은 생각들을 기억창고에 채우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대의 기억세포에 저장된, 그대만의 생각속에서의 환상의 나레를 펼지는 것이다. 그대만의 생각속에서의 생각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오직 그대만의 생각으로, 하지만 타인들로부터 끌어모은 지식에 바탕을 둔 ... 그대만의 생각으로써 세상을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너'는 다르다고 믿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세상이 분리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자연이 분리된 것이다. 오직 그대만의 생각속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의 생일까?
자아의 생각일까?
생각의 자아일까?
자신의 무지를 지식이라고 주장했던 인물이 '데카르트'라는 사람이다.
'생각에 의해서 내가 존재함을 안다'는 자의 말은, 참으로 옳은 말인 것 같다. 그런데. 심각한 오류가 있다.왜냐하면, 생각의 의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을 안다면, 생각의 의해서 신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알아야만 올바른 앎이기 때문이다.
자아와 생각.
생각의 주체가 자아가 아니라,
자아의 주체가 '생각'이다.
사실 이런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하는 인간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하는 인간만이 가치 있는 삶을 창조해 나갈 수 있는 것이며, 나머지는... 짐승보다 더 뛰어날 것이 없는.... 비천한 삶으로써... 바참한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누구나, 죽음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죽음에 대한 고통과 두려움은 여전히 간직된 채... 자기주장을 위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그 생각의 흐름에 대해서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없으며, 감지할 수 없으며, 느낄 수 없다. 다만 그 생각에 의해서 이리저리 이끌려 다니는 것이며, 기억된 낱말들에 대해서 사실적인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언어의 윤회이며, 생각의 윤회에 속수무책으로 이끌려 다니는 것이다.
'사느냐, 죽느냐'는 말은 상대적인 말이다.
말은 본래 있던 것이 아니라, 의미없는.... 상대적인 소리들을 만들어 냄으로써 그 의미가 주어진 것이다. 가령.. '사느냐 죽느냐'는 두 구절을 한구절로 반복하여 계속 읽다보면... 그 뜻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면서 의미 없는 소리가 된다.
'사느냐죽느냐사느냐죽느냐사느냐죽느냐' 라는 방식으로 계속 반복한다면... 그것은 의미을 사실한 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행복과 불행이라는 말 또한 그러하다, 상대적인 말로써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근거가 없는 말이다. 왜냐하면 상대적인 것들은... 그 원리가, 하나가 사라지면, 그 대상 또한 홀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사라지기 때문이다.
'나 와 너' 라는 말이 그러하며, 동전의 양면이 그러하며, 손뼉소리가 그러하며, 밤과 낮의 비유가 그러하다. '행복불행복불행복불행'... 이라는 말을 계속반복한다면.... 불행복불행불복행불복행... 같은 방식으로써 의미가 상실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사랑과 증오 또러하다. 사랑증오사랑증오사랑증오사랑증오... 가 된다. 거꾸로 읽는다고 하더라도 같다. 오증랑사오증랑사오증랑사.. 라는 소리로써 의미 없는 소리들이다. 소리와 형상으로 여래를 볼 수 없다는 석가모니의 말 또한 이와 같은 맥락이다. 본래 없던 소리들에, 다른 소리들로써 이미라는 말을 창조하게 된 것이기 때문에... 언어의 근원에는 언어가 없는 것이다.
사실 생각 또한 그러하다.
가령 아름다운 장미꽃 한송이를 생각해 본다고 하더라도, '장미꽃'이라는 말이 없다면... 그것을 상상할 수 없다. 설령 '장미꽃'을 상상한다고 하더라도.... 그 꽃에 대한 생각, 상상, 환상은... 절대로 1초동안도 지속될 수 없다. 기억세포에 저장된 환상물질들... 컴퓨터에 저장된 그림과 같이 열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이름, 명칭이 없다면... 실행시킬 수 없는 것이며, 설사 실행시키더라도... 단 1초동안도 생각의 흐름을 멈출 수 없기 때문에... 장미꽃을 상상하더라도, 다른 얼굴을 상상하더라도... 동일한 모습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해가는 추상화 같은 것으로써... 흐릿한 이미지만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대 자신의 얼굴에 대한 생각, 상상 또한 그러하다. 그대가 상상하는 그대의 얼굴과 그대가 거울을 통해서 보는 그것과의 차이에 대해서 상상해 보라.
물론 그림을 그릴때에는... 하나 하나... 그려 나갈 수 있기 때문에, 어떻게 그리든지간에, 사실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 또한 그 순간일 뿐, 생각의 운회는 이와 같이... 잠시도, 아니 찰나지간 동안이라도 한곳에 머물 수 없다.
그대 자신은 사실. 그런 희미한 생각들, 감지될 수 없는 생각의 윤회에 의해서 창조된 환상물질인 것이다. 그대는 절대로 그대의 생각을 붙들수 없다. 그대의 생각이라지먼, 그대의 생각을 절대로 멈추게 할 수 없으며, 쉬게 할 수도 없다. 사실. 숨쉬는 일은 잠시 멈출 수 있으나... 생각의 윤회, 생각의 흐름은 절대로 멈출 수 없다. 사실 세월이 가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간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그 생각의 작용에 이리저리 이끌려 다니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각은 그토록 찰나지간으로 생멸을 반복 순환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짐으로써... 그 시작과 끝을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가 깊이 잠든 시간을 알 수 없으며, 깨어나서도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사실. 시간과 공간의 관념은 오직 인간들의 통념속에만 있는 것이며.... 착각현상이다. 그대가 깊이 잠든 동안에는 시간이나 공간의 관념이 없을 뿐만이 아니라, 그대의 나와 그대의 대상들이 모두 사라져 없었기 때문이다.
그대가 그런 사실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인간이 무엇인지 조차 해답을 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대의 기억된 생각들 속에서... 고통이라는 말과 연관된 어떤 사람의 얼굴을 상상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그 얼글을 떠올린다고 하더라도... 단 1초 동안도 한가지의 상(생각)이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하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대가 지금 스스로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얼굴에 대해서 상상해 보라. 절대로 단, 1초, 단 3초 동안도... 그 얼굴모습이 같은 모습으로 이어질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같이 그대가 과거를 기억하는 것들 또한.... 언어를 기억하는 것이거나... 그 '정황'에 대해서 기억하는 것이다. 그 정황, 상황들 또한 언어 없이는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언어가 없다'는 말을 아는 것과 '언어가 없음'을 경험하는 것은 다르다. 죽음이라는 말을 아는 것은, 죽음을 아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사실 인간은 죽음을 경험할 수 없지만... 죽음에 대해서 상상할 수 있다. 사실은 죽음은 없다. 죽음에 대해서 상상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말, 말, 말에 대해서 상상하는 것이다.
사실. 죽은자에게는 죽음이 없다.
죽은자에게는 과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 소위, 명색이.... '깨달은 자들'에게는 과거가 없기 때문에... 현제에 머무는 것이다. 과거가 없기 때문에 미래가 없다. 그런 말을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세상 어떤 일에 대해서도 집착함이 없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결국 꿈이기 때문이며, 결국 모두 버려져야 할 것들이기 때문이다.
사느냐, 죽느냐... 사실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삶에는 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산자는 죽음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은자에게는 죽음이 없으며, 삶이 없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죽음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고통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말, 말, 말... 지식, 언어가 없는 어린아이들의 소꿉놀이가 순수하듯이, 평화롭듯이... 그대 또한 본래 언어에 묶인 자, 경험에 바탕을 둔 생각의 노예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지적으로나마 이해 할 수 있다. 언어가 상대적인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다. 언어가 명색의 동일시일 뿐, 허구적인 것들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다.
'도' '진리' '깨달음'이란... 경험에 바탕을 둔 생각들, 기억세포에 이미 저장된 생각들 속에서, 다른 낱말들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의 윤회에서 벗어남을 이르는 말이다. 그 생각들의 반복순환되는 윤회를 끊음으로써, 육체가 나다, 육체가 나가 아니다는 이분법적 논리가 모두 허구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하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육체에 얽매인 정신에서 해방되는 것이며, 인간세상의 모든 지식이 허구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앎으로써 존재 자체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지성체는 그 앎에 대해서 ''원리를 이해 하는, '진리'' 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 같다.
'진리'란... 인간생명체의 원리를 이해 하는 앎이며, 우주의 근원을 이해 하는 앎이며, 따라서 삶을 아는 앎이며, 죽음을 아는 앎이다. 지성체가 수천년 연구하는 학문들이 모두 허구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앎이며, 언어의 기원을 아는 앎으로써, 논리적인 말을 할 수 있는 올바른 앎을 아는 것이다.
인간의 어리석음이란.... 말, 말, 말들 속에서 '진리, 도, 깨달음'을 찾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텅 비어 있는 空' 을 보는 것이 아니며, '본래무일물이라는 '無' 를 찾는 일도 아니며, 오직 자신의 생각의 흐름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으로 전해지는 '생각의 윤회'를 끊어 내는 일로써, '생각의 원리, 즉 생각의 이치와 속성'에 대해서 이해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생각의 '윤회'가 끊어지므로써... '육체가 나다, 아니다' 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구속이나 자유라는 말이 없는... 무위자연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더 이상 인간에게 길들여질 수 없는...
더 이상 고통이라는 생각이 일어날 수 없는...
삶과 죽음의 한계를 초월한, 그러므로 그져 존재하는... 물질이며, 이름지을 수 없는 '그것'이다.
그대 또한 '그것'을 경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젠 그 길,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유일한 길이며,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진리'라고 한다.
인간들의 지식에 대해서 어린아이들의 말재간 쯤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인물들이 많고도 많다. 오직 그들만이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인물들이며, 더 나아가 인간세상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는 인물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서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이 지식으로써 그런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없다면, 소크라테스를 동경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 같다. 우상으로 숭배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의 말들을 삶의 지침으로 삼아도 좋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예수, 석가모니, 노자.... 등의 말들 또한 '소크라테스'의 말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지만... 그들의 참된 가르침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이며, 언술이 뛰어난 자들에 의해서 서로가 갈등하고 시기하는... 그래서 피를 흘리는... 전쟁을 예고할 수밖에 없는... 종교나부랭이들, 명상 집단들로 전락되었기 때문이다.
일념법. 일념명상법이 진리이다.
왜냐하면, 그대의 마음의 근원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법이기 때문이다.
참다운 삶, 가치 있는 삶을 위한 유일한 인생의 길이기 때문이다.
인연있는자에게 영원한 평화 있기를...
일념명상의 집 '도가' ---> http://blog.daum.net/powwr116/?t__nil_login=my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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