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 지성체의 허구

존재와 시간 - 인간의 본질적 문제 / 마틴 하이데거 - 위대한 사상가, 그들 지식의 허구와 망상 - 진리란?

일념법진원 2014. 12. 16. 05:18
존재와 시간 - 마틴 하이데거 [1]
 
 

원전 요약

존재를 시간의 관점에서 해설한 책이다. 우리가 이해하는 다양한 존재방식들이 인간의 사유와 더불어 형성되는 시간-지평에 의거해 이해된 것임을 밝혀, 존재론의 근거가 시간이자 인간 자신이라는 점을 밝힌 저작으로 현대의 존재사유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다. 현대의 모든 철학이 직접, 간접적으로 이 책의 영향을 받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존재와 시간』에서의 존재물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론으로 수행된다. 인간의 존재이해를 실마리로 하여 인간의 실존론적 구조를 해명함으로써 존재 일반의 의미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 『존재와 시간』의 근본목표이다. 이런 논의 과정에서 전통적 서구 형이상학의 본질적 문제인 인간, 세계, 시간, 존재에 대한 물음이 이제껏 아무도 이르지 못한 새로운 토대에 놓일 뿐더러, 종래 윤리학이나 종교의 차원에서 논의되던 죽음과 양심의 문제가 새롭게 실존론적으로 정초된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관심은 단순히 인간의 실존론적 구조에 대한 이론적 천착만이 아니었다. 그는 궁극적으로는, 일상적 세계에로 퇴락한 인간을 끄집어내어 가장 적나라한 본래적 자기 앞에 세워 놓고자 한다. 선구적 결의성을 통해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허무한 실존을 떠맡아 본래적 자기로 변양한다. 이로써 인간은 전통 속에 매몰된 세상 사람들로부터 벗어나 어떤 개념을 가지고 어떻게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지를 각성하게 된다. 아마도 당시 세계의 많은 젊은이들이 하이데거에게 열광한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원전 해설

하이데거가 수학하던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시절 그의 사상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은 후설의 『논리연구』였다. 박사학위 논문인 『심리주의의 판단론』, 교수자격 취득논문인 『둔스 스코투스의 범주론과 의미론』은 물론, 초기의 대표작인 『존재와 시간』및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도 기본적으로는 현상학적 시각을 바탕으로 쓰인 작품이었다. 따라서 하이데거가 당시에도 이미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전문가로서 상당한 명성을 지니고는 있었으나 그의 대한 세평은 후설의 추종자 정도였다. 

그러나 1927년 『존재와 시간』의 출판 이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 작품의 성과는 실로 대단했다. 그는 즉각 학계의 주목을 받았을 뿐더러 무엇보다도 20세기 철학자 중 아무도 대적하지 못할 만큼 비상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의 제자인 한나 아렌트(H. Arendt)는 하이데거의 사유의 폭풍을 플라톤(Platon)에 비유할 정도였고, 이미 그가 생존하는 동안에도 세계 철학계는 그를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로 주목하게 되었다. 『존재와 시간』은 일거에 하이데거를 20세기 철학의 거장 반열에 올려놓은 것이었다. 

이 작품은 너무도 비범했다. 이 작품은 고전적 인식론에서 논의되던 일련의 낡은 물음들을 자신의 사유 세계 안에서 새롭게 걸러 내었을 뿐 아니라, 신칸트학파로부터 가치철학에 이르는 당대의 철학적 문제를 모두 껍데기로 처리했고, 번개 불처럼 철학의 아성들에게 철퇴를 내리쳐 플라톤으로부터 니체에 이르는 형이상학을 새롭게 조명하였다. 더욱이 언어마저 독특하였기에, 이 작품은 동시대인들에게는 처음부터 생소하게 여겨졌다. 

이미 20년간의 역사를 지닌 채 새로운 발전 방향을 모색해야 했던 현상학도 마찬가지였다. 이 작품을 헌정받은 후설(Husserl)이 놀라움을 넘어선 실망감을 토로할 정도로 하이데거는 이미 후설의 추종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젊은 시절의 하이데거는 벌써 자신만의 독특하고 다양한 언어로 새로운 사유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면 『존재와 시간』이 몰고 온 폭풍의 비밀은 무엇인가? 폭풍의 비밀은 존재의 의미에 관한 물음이다. 언뜻 보면 간단한 듯한 이 물음이 우리를 인간 존재의 심연으로 안내한다. 존재의 의미에 관한 물음을 제기하겠노라고 나선다면, 그것은 가히 놀랄 만한 일이다. 아무도 이 물음을 실존론적으로 해석한 예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 물음이 결코 새롭지 않다는 점을 하이데거도 솔직히 인정한다. 존재의 의미에 관한 물음의 당혹감을 설파하는 플라톤의 『소피스트 대화록』은 이 물음이 형이상학 자체의 역사만큼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렇다면 하이데거는 우리를 철학적 전통에 얽매려고 했던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하이데거는 전통에 도전하는 철학자이다. 그는 전통을 철저히 사유하여 전통을 극복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그는 형이상학적 전통의 배후로 되돌아가 형이상학을 가능하게 했던 근원적 영역에 대해 물음을 개진한다. 그러고는 칠흑 같은 어두움에 파묻혀 있던 존재의 의미를 우리에게 드러낸다. 존재물음은 궁극적으로는 형이상학적 물음에 대한 비판적 대결이 된다. 

존재와 시간』에서의 존재물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론으로 수행된다. 인간의 존재이해를 실마리로 하여 인간의 실존론적 구조를 해명함으로써 존재 일반의 의미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 『존재와 시간』의 근본목표이다. 이런 논의 과정에서 전통적 서구 형이상학의 본질적 문제인 인간, 세계, 시간, 존재에 대한 물음이 이제껏 아무도 이르지 못한 새로운 토대에 놓일 뿐더러, 종래 윤리학이나 종교의 차원에서 논의되던 죽음과 양심의 문제가 새롭게 실존론적으로 정초된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관심은 단순히 인간의 실존론적 구조에 대한 이론적 천착만이 아니었다. 그는 궁극적으로는, 일상적 세계에로 퇴락한 인간을 끄집어내어 가장 적나라한 본래적 자기 앞에 세워 놓고자 한다. 선구적 결의성을 통해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허무한 실존을 떠맡아 본래적 자기로 변양한다. 이로써 인간은 전통 속에 매몰된 세상사람들로부터 벗어나 어떤 개념을 가지고 어떻게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지를 각성하게 된다. 아마도 당시 세계의 많은 젊은이들이 하이데거에게 열광한 이유는 여기에 있으리라. 

존재물음은 한 민족의 정신적 운명을 저울질하는 사건이다. 아마도 많은 이들은 이를 과장으로 여길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 민족이 존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 민족의 역사적 삶이 펼쳐진다면, 존재물음은, 비록 지극히 멀고 또한 지극히 간접적으로나마, 한 민족의 역사적 결단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존재의 의미에 관한 물음을 제기했던 것이며, 이로써 형이상학적 위기에 처한 인간을 구제하기 위한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아마도 바로 여기에 하이데거 사유의 위대함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기존의 『존재와 시간』은 완성된 작품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원래 이 작품을 두 부로 계획했었다. 제Ⅰ부는 ‘현존재를 시간성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시간을 존재에 대한 물음의 초월론적 지평으로서 해석한다’는 주제 아래, 제Ⅰ편 ‘현존재의 예비적 기초분석’, 제Ⅱ편 ‘현존재와 시간성’, 제Ⅲ편 ‘시간과 존재’를 기술할 예정이었다. 

또 제Ⅱ부는 ‘존재시간성의 문제를 실마리로 한 존재론 역사의 현상학적 해체의 개요’라는 주제 아래, 제Ⅰ편 ‘존재 시간성의 문제의 전(前) 단계로서의 칸트의 도식론과 시간이론’, 제Ⅱ편 ‘데카르트의 ‘cogito sum’(나는 생각한다 나는 존재한다)의 존재론적 기초와, ‘res cogitans’(생각하는 사물)의 문제로의 중세 존재론의 인수’, 제Ⅲ편 ‘고대 존재론의 현상적 토대와 한계를 판별하는 기준으로서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에 관한 논문’을 기술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출판한 글은 제Ⅰ부의 제Ⅰ편과 제Ⅱ편에 불과하였다. 마르부르크 대학교 철학부의 학장은 하르트만(Hartmann)의 후계자로 하이데거를 추천하기 위해 하이데거에게 미비한 논문이나마 출간하도록 강요하였으나, 하이데거는 제Ⅰ부 제Ⅲ편마저 삭제하고 말았다. 그 까닭은 ‘시간과 존재’를 기술할 만한 적합한 언어를 그 당시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제Ⅰ부 제Ⅲ편 ‘시간과 존재’는 그 이후 『사유의 사태』(1969)에 수록되어 발표되었고, 제Ⅱ부 제Ⅰ편 ‘칸트의 도식론과 시간이론’은 단행본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1929)로 발표되었으며, 또한 제Ⅱ편 ‘데카르트의 ‘cogito sum’ 및 제Ⅲ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이론’은 『존재와 시간』 제3장 ‘세계의 세계성’ 및 81절에서 각각 이미 상술되었다. 또한 ‘존재 시간성의 문제를 실마리로 해서 존재론의 역사를 해체한다’는 과제는 비단 몇 저서에만 국한되지 않고 하이데거의 많은 저술에서 거론된다. (어느 브로그에서 퍼온 글이다)  

형이상학의 본질적 문제인 인간, 세계, 시간, 존재에 대한 물음이 이제껏 아무도 이르지 못한 새로운 토대에 놓일 뿐더러, 종래 윤리학이나 종교의 차원에서 논의되던 죽음과 양심의 문제가 새롭게 실존론적으로 정초된다

정말 인간들은 존재의 가치기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정말 인간들은 죽음을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정말 인간은 시간과 공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종교는 어디에 가치가 있는 것일까?

양심은 있는 것일까?

인간은 실존일까?

 

사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단 하나다. 인간은 실존론을 주장하지만, 실존이라는 근거가 없다. 실제로 경험한다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까닭은 자신의 생각의 윤회현상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을 하는 주체가 자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은 자신의 어린아이시절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은 진리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이다. 진실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이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수많은 의문을 제기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사실 인간들의 어리석음이 참으로 신비한 이유는... 진정으로 의문을 제기하고 스스로... 죽음을 각오하고 그 원인, 원리를 찾았던 사람들의 말은 들으려 하지도 않는 다는 것이다. 아니. 알아들을 수 없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소크라테스의 말'에 대해서라도 이해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도대체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의 뜻에 대해서 좀더 숙고해 볼 수는 없는 것일까? 말을 배우는 어린아이들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하는 것일까?

사실 인간이 실존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자신의 삶을 타인들이 대신 살아줄 수 없기 때문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뜻이라고 본다면, 실체라는 말은 우주의 근원본 원인으로써의 사실적인 것이며 유일한 것이다. 사실. 과학은 이런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어떤 물질적인 것들이라고 하더라도 근원물질, 즉 근원인자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근원물질, 근원인자는 없다. 그것이 우주거나, 동물이거나 인간이거나, 물이거나 흙이거나... 근원이 되는 원인물질은 없다. 물론 입자와 파동이 있다고 주장한다다지만... 입자와 파동 또한 보는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는자는 인간이며, 개체적 자아들이다. 자아들의 사고방식으로 볼때, 보는자가 있기 때문에 우주만물만상이 있는 것이다.

다만 인간은 자신의 부재상태에 대해서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과 세상이 사실적이라고 믿는 것이다. 인간은 여전히 인간의 기원에 대해서 '신, 절대자'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절대자가 있다는 생각도 인간의 생각일 뿐, 절대자의 생각은 아니다. 사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부재상태를 경험한다. 죽음을 경험하는 것과도  다르지 않는 경험이 '잠을 자는 일'이다. 사실 깊이 잠들어 있는 시간동안에는 실존 따위는 없다. 자아가 없을 뿐만이 아니라, 우주 만상만물이 없다. '본래무일물,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언어가 없는 상태' 라는 말로 표현되더라도 납득할 수 없겠지만... 개체적 자아는 항상, 매일 매일 '본래무일물' 상태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다만 경험하는 동안(깊이 잠들어 있는 동안)에는 보는자, 자아, 경험자가 없을 뿐이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때 비로소 '자아를 인식하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자아'가 있기 때문에 자아를 인식함과 동시에 세상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렇다. 생각의 생멸현상 작용의 지극히 일부분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사실. '생각의 원리' 라는 말은 인간세상에서는 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다.

인간은 깊은 잠을 통해서 석가모니의 말로 전해지는 '본래무일물' 의 상태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자아들의 생각의 작용, 즉 끊임없이 생멸을 반복순환하던 생각의 흐름이 잠시 휴식을 취하는 동안'의 상황이다. 그런 상태에 대해서 '허공, 없는 것' 등으로 표현된 것이다. '자아'가 본래 없는 것이며, 그 대상 또한 본래 없는 것이다. 인생무상이라는 말과 같이 본래 형상, 물질이 없는 것이다.

자아와 세상 만상만물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경험된 사고방식, 즉 관념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만 인간은 자신의 생각의 끊어짐(휴식)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사실적인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인류는 이런 사실에 대해서 영원히 이해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마음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는 사실이다. 사실 마음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식이 곧 마음이다. 타인들로부터 듣고보고 배웠던 말, 말, 말들... 그 낱말들이 기억세포에 저장된 것들이며, 기억된 언어들에 대해서 마음, 생각, 지식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다.  

사실. "인간이 본래 인간이다" 라는 근거가 없는 것과 같이 마음 또한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린아이시절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생각의 생멸현상이 끊어짐의 상태'에 대해서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삶을 경험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며, 죽음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죽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서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경험할 수 없는 사람들의 지식에 의해서 죽음을 두려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개체적 자아의 죽음이란 깊이 잠듦의 상태와 같은 것이다. 그와 같이 죽음은 경험될 수 없는 것이다. 산자들의 어리석음에 의해서 죽음을 두려움과 고통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생각하는 것이다.   

마음이 본래 있는 것이라고 믿는 한, 인류에게 행복이나, 자유, 평화로운 미래는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이며, 그 끝없는 욕망은 오직 인간이 매개체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인간들을 위해서 사는 것 같이 보이지만... 인간이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권익을 위한 도구들로써의 관계가 인간과 인간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들의 존재라는 것들... 장기판을 보는 것 같다. 똑 같은 인간들끼리... 서로가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 이해 조차 불가능한 인간들이 서로가 편을 가르고 왕을 정하고, 말은 이리 뛰면서 걸리는 것을 죽이고, 車는 길을 막는 것은 누구나 죽이고, 졸병은 몸을 죽여서 다른 것들을 보호하는 것과 같은 짓들을 반복하는 것이다. 왜 똑 같은 인간들끼리 서로가 서로를 죽이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일까? 

사실. 인간세상에 쓸모 없는 것들이 있다면... 무수히도 많은 학문을 연구한다는 것들이다. 그것이 종교든, 문학이든, 과학이든, 의학이든, 신학이든... 모든 학문들이 그러하다. 지들끼리 편을 갈라 놓고서 자화자찬이다.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마음이 무엇인지 이해 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진정으로 평화롭기 위해서는 지식이 아니라, 진리에 대해서 이해 해야만 한다. 위대하다는 말은 지식따위들의 말재간이 아니라, 왜 인간이 평등하여 평화로울 수 없는 것인지에 대해서 스스로 깨달아 아는 앎을 전했던 예수, 석가모니, 노자 장자, 소크라테스 등이 위해한 인물들일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 이해 조차 할 수 없는 자들의 헛소리들에 대해서 위해하다는 방식으로 세뇌당한 인간들... 안타깝기에 하는 말이다. 인류, 지식들... 이제라도 진리를 구해야만 한다. 지식은 지식일 뿐,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학문이라는 것들, 학자라는 중생들이 '마음이 본래 없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을때, 그때 비로소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며, 인간들... 인류 모두가 평화로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치 있는 삶이란, 자신의 끝없는 욕망을 채우기 위한 삶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허구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함으로써 타인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말과 같이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며, 자신의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로써 비로소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며, 죽음 앞에서도 여여할 수 있는 것이다. 삶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며, 죽음 또한 본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지금 이순간을 경험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금 이순간'이라고 생각하더라도, 순간이라고 생각하는 찰나, 현제가 아니라 이미.... 과거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진리의 말 중에 중요한 말이 있다. 유일한 악은 지식이며, 유일한 선은 앎(진리)라는 말이다. 인간들의 지식은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지한 자들의 비교적 선량한 인간들에 대한 악행이다. 왜냐하면 올바른 앎이 아니명서 사실인냥, 진리인냥 주장하기 때문이다. 현시대의 지식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노자'의 말과 같이... 그것들은 결국 짚으로 만든 개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인간을 창조한 신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들 또한 그러하다. 신이 있다는 생각이나, 하나님이 있다는 생각이나, 스승이 있다는 생각들은 오직 인간들만의 생각이다. 생각하는 주체가 하나님이나, 신, 절대자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 이해 조차 불가능한 인간들의 생각이다. 인간이 자신의 생각의 원리에 대해서 이해 한다는 것은, 우주를 이해 하는 것이며, 생명의 비밀에 대해서 이해 하는 것이다.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 여전히 미신(하나님의 창조, 단군신화)에 의존하는 지식이라면, 모든 지식은 근거 없는 낭설에 바탕을 둔 미신이며 그 미신을 합리화 시키기 위한 것들이 지식이라는 것들이다. 그러니 무한한 어리석음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학문, 문학... 모두 헛소리이다. 정신나간자들의 말장난들인 것이다. 인간세상의 '신화, 전설'에 바탕을 둔 모든 지식들, 그 지식에 바탕을 둔 교육들... 인간세상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는 전혀 쓸모 없는 것들이며, 가치 없는 것들이다. 그것들이 지식을 버리고 진리를 추구할 때, 그때 비로소 인간세상은 평화로운 세상으로 거듭날 수 있을 뿐이다. 

진리와 인연있는 이에게 영원한 평화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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