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들에게는 '중도론' 이라는 말로 표현 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중도'는 남들을 의존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달아 아는 앎이기 때문이다.
사실, 지식이란 모두가 '論' 이거나 '說' 로써... 서로 다른 언어를 주장하는 것일 뿐, '중도'를 실천할 수 있는 앎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용' 이라는 말 또한 그러하다.
사실 '중용'은 '중도'를 이해 할 수 없는 자들의 서로 다른 견해일 뿐, 정견은 아니며, 정견 또한 지식으로써 이해 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식은 스스로 아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로부터 얻어진 앎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의 삶이라는 것은 어떤 사고방식으로 살거나 모두가 타인들의 삶을 흉내내는 것들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만약에 일념법, 일념명상법으로써 '스스로 깨달아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인생은 그사람의 인생이 아니라, 여러 타인들의 인생을 사는 것이며, 자신의 삶이 아닌 것이다. 인간세상 인간들의 모든 삶이 이와 같다.
진정으로 자신의 인생이라면 남들로부터 배워서 아는 앎으로써의 삶이 아니라, 오직 자신이 스스로 깨달아 아는 앎으로써의 삶이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남들의 삶을 흉내 내는 것이 고작이기 때문이며, 남들에 의해서 자신의 삶의 가치를 평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남들에 의해서 평가받는 삶이라면, 어찌 그것에 대해서 자신의 삶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말이다.
석가모니의 말이 한자로, 그리고 한글로 번역된 말 중에 '중도'에 대한 설명이 있다.
우선 '정견' 이라는 말에 대한 설명은... '남들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아는 것' 이라는 견해이다. 이 말은 '일념법, 일념명상법'으로써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이해 하는 앎을 이르는 말이며, 생각의 생멸현상에 대해서 이해 하는 앎을 이르는 말이다. 더 나아가 '생각의 원리'에 대해서 이해 하는 앎을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중도'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아래와 같다.
세간의 발생을 사실 그대로 바르게 알고 본다면 세간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요, 세간의 소멸을 사실 그대로 알고 본다면 세간이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이것을 두 극단을 떠나 "중도"에서 말하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두 극단을 떠난 "중도" 에서 말하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라는 말이다.
'세간의 발생' 이란, 천지창조라는 말과 같은 뜻이며, 인간들의 '빅뱅론'을 비롯하여 여러 창조론을 일컷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말은 "사실 그대로 바르게 알고 본다면..." 이라는 말이다. "사실을 사실 그대로 바르게 알고 본다" 는 말은... "남들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깨달아 아는 앎으로 본다" 는 말이다.
사실 인간들의... 누구나 '내가 사람이다 라고 아는 것' 조차도 남들을 의존하여 아는 것이다. 남들에게 배우고 익혀서 아는 앎에 의해서 '내가 사람이다' 라고 아는 것이다. 남들에게 배우고 익히지 않았다면 '내가 사람이다' 라고 아는 앎 또한 없는 것이다. 지식이 이토록 무지몽매한 것이다. '중용' 이나 '중도' 라는 말 또한 그러하며, 창조론 또한 그러하며, 인생론 또한 그러하며, 인간론 또한 그러하며, 종교론 또한 그러하며, 명상론 또한 그러하다.
그대의 '내가 사람이다' 라는 앎 조차도 스스로 아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로부터 얻은 지식으로써 아는 앎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지식들이야말로 쓸모 없는 것들이며, 논란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세간의 모든 인간들의 모든 앎이 그와 같기 때문이다. 자신이 스스로 아는 것이 아니라, 남들로부터 얻어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올바른 앎으로 본다면... 시명(是名) 중도(中道) 라는 말과 같이... '중도' 또한 '이름' 으로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본래 없는 것이다'는 말이며, 인간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지식에 의해서 '창조'가 있다는 말이며, 창조 또한 '창조' 라는 말이 있을 뿐,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공즉시색, 색즉시공' 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세간의 발생을 사실 그대로 바르게 알고 본다면 세간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요, 세간의 소멸을 사실 그대로 알고 본다면 세간이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이것이 두 극단을 떠난 '중도'에서 말하는 것이니라. 라는 말...
'공즉시색, 색즉시공 공불이색, 색불이공' 이라는 말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사실, 그대는 자신의 태어남을 기억할 수 없다.
사실, 그대는 '태어나기 전' 에 대해서 상상할 수 없다.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단지 '태어나기 전이라는 말' 그 말, 말, 말에 대해서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설령 '세상이 본래 없는 것이다' 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본래 없는 것이다' 는 말, 말, 말에 대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대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대가 없다면, 세상 또한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대가 있기 때문에 세상이 있는 것이며, 올바른 앎이라면... 그대가 곧 세상의 창조자라는 말이며, 신의 피조물이 아니라 신을 창조한 것이며, 신이 있다면, 신과 그대는 본래 동등하며, 다른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무슨 말이겠는가?
그대의 삶 자체가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허구적인 것이며, 그대가 추구하는 모든 것들 또한 부질없는 욕망으로써 고통이 아닐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고통의 원인이 앎(識)이라고 하는 것이며, 남들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아는 앎인 진리의 앎으로써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이런 설명들로써 또 다른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아는 앎을 얻는 방법인 것이다. 이곳에 쓰여지는 말들 또한 그대의 입장에서 본다면 '남을 의존하여 아는 지식'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이곳 글들로써는 자신의 앎이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올바른 이해로써 비로소 일념법, 일념명상법으로써 수행 할 수 있는 것이며, 자신 스스로 깨달아 아는 앎일 때 비로소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며, 더 나아가 검증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수행이라는 낱말의 한자의 뜻은 '닦을 修' 자와 '다닐 行' 자로써의 '중도'의 행위를 닦는다는 뜻이지만, 수행의 본래의 뜻은... '얻을 수, 받을 受' 의 '수행'으로써 '올바른 앎, 참된 도리, 진리의 앎을 얻기 위한 행위' 라는 뜻이다.
오직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한다는 말은... 남들을 의존하지 않고 아는 올바른 앎일때 비로소 진정한 행복이나 자유,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이며, 더 나아가 삶과 죽음의 한계를 넘어서는 진리와 하나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또한 노자의 '도를 아는 사람, 도와 간격이 없는 사람' 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진리의 앎에 대해서 지적으로써도 이해 할 수 있는 까닭은, 지식은 상대적인 것에 대해서 무조건 적으로 주장하는 것인 반면에 진리는 절대적인 앎이며, 지극히 논리적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진리에 대해서 이해한다는 것은 자연의 원리에 대해서 이해 하는 것이며, 최소한 자신의 몸의 질병으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도가의 단식법과 '도가의 약식'으로써 모든 불치병이 완치될 수 있는 까닭은 생명의 비밀을 이해 하는 앎에 바탕을 둔 것이며, 자연의 원리에 바탕을 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일념법, 일념명상법으로써 남들을 의존하지 않는, 스스로 깨달아 아는 올바른 앎일 때 비로소 '信念'이 생겨나는 것이며, 그런 올바른 앎에 대한 믿음으로써 모든 고통 또한 사라지는 것이며, 더 나아가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진리와 인연있는이에게 영원한 평화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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