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론 - 잘사는 삶 · 올바른 삶

행복의 조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영혼의 서/ 인간에게 유일한 행복이란... (中道)

일념법진원 2015. 2. 5. 08:02

소크라테스 - 행복과 중도의 가르침.

 

플라톤의 4복음서(《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향연》) 중의 하나로 그의 초기 대화편(對話篇)이다. 기원전 399년 부당한 죄상으로 피소된 소크라테스의 법정(法廷) 변론이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부당한 죄상의 중요한 원인이 된 것은 무지(無知)에 대한 지(知)의 가르침이었다. 즉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기는 모르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과 같으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그만큼 다른 사람에 비하여 얼마간은 지자(知者)일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첫째가는 현자(賢者)이다"라고 하는 델포이의 신탁(神託)에 대한 그의 해석이었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에게 무지를 깨우치는 일이 신의 뜻에 좇는다고 생각하여 엄격한 대화를 통해서 사람의 억단(臆斷)의 꿈을 깨뜨려 나갔다. 이것이 사람들의 앙심을 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람의 무지를 자각하게 하고 알게 하는 일에만 전념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우리들은 신의 지(知)에 대해서는 무지와 다름없으므로, 그러면 그러할수록 진지(眞知)를 사랑하고 정신을 높이지 않으면 안 된다면서 신체나 재산보다 먼저 이 일에 마음을 써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지를 사랑하고 구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가장 큰 열쇠라고 하였다. "아테네의 시민들이여, (중략) 어떻게 하든 나는 결코 나의 행동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설사 몇 번이나 죽음의 운명에 위협을 받는다 해도."라고 애지(愛知)에 대한 각오가 언급되고 있다. 결국은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시종일관하여 두려움 없이 자기의 소신을 말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떠날 때가 왔다. 나는 죽기 위하여, 여러분은 살기 위해서. 그러나 그 어느 것이 더 행복한가에 대해서는 신 이외에 아는 자는 없다." 이것이 이 글의 마지막 구절이다. 또한 이 책은 위대한 철학자인 소크라테스의 영혼의 서(書)이며 제자인 플라톤이 심혈을 기울여 지난날의 소크라테스를 같은 세대의 사람이나 후세에 전해 주려고 한 불후의 명저이다.

(위키, 백과사전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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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죽은 사람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있다면, 불치병 환자이다. 

왜냐하면 이미 죽은 사람은 행복이나 불행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며, 불치병 환자는 아직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치병 환자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살아 있는 사람들 중에서 내가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진리와 인연이 있는 불치병 환자라면... 사실 인간세상에서 가장 복이 많은 사람이다. 왜나하면 그는 올바른 앎으로써, 불치병을 치료할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진리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며, 새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가치 있는 삶을 넘어서 검증된 삶으로써 삶과 죽음의 한계를 넘어 기쁨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에게 무지를 깨우치는 일이 신의 뜻에 쫒는 것이라는 방식으로 말함으로써 지식의 한계를 벗어난 진리의 앎에 대해서 '신의 뜻'과 같다는 방식으로 설명한 것 같다. 이는 노자의 '하늘의 도리'에 따르는 삶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며, 또한 예수의 '하나님 말씀' 이라는 말과 같은 맥락인 것이다. 그리고 석가모니는 그것에 대해서 '나 아닌 나' 라는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며, 몸과 마음음 본래 '나我' 가 아니다, 라는 방식으로 설명한 것이다. 왜냐하면, 육체와 마음은 본래 '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육체가 나다' 라는 앎(마음=지식)은 (기억할 수 없으나) 순수의식에 각인된 "육체가 나라는 생각일 뿐' 하나의 고정관념이다. 그리고 육체가 나 라는 생각은 육체가 나가 아니라는 생각과 상대적인 생각이며, 또한 상대적인 언어로 구성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가 나' 라는 고정관념은 사실적인 사건에 대한 앎이 아니라 단지 한생각의 차이이며, 근거 없는 앎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는 생각의 환상물질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무지에 대한 지의 가르침이다" 라는 말이다. 그리고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구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가장 큰 열쇠라는 말이다. 가장 큰 열쇠라는 말 보다는 유일한 길이며, 유일한 방법이다, 라는 말이 더욱 더 분명한 말이다. 왜냐하면 현시대 까지도 사람들의 앎인 지식의 앎으로써는 행복을 추구할 뿐,  '행복한 사람'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지식은 행복을 추구하지만 행복을 찾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허구적인 것이며, 몽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 중세, 그리고 현시대까지도 '행복은 단지 추구하는 것' 일 뿐, 행복한 삶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왜냐하면 인간 삶의 결론은 어떤 사고방식으로 존재하거나 결론은 고통과 두려움으로 인식되는 죽음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진리의 앎, 즉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진지'란 진리를 일컷는 말이며, 올바른 앎이란 삶과 죽음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허구적인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깨달아 아는 앎이며 또한 시간과 공간이 본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깨달아 아는 앎을 이르는 말이다. 

 

사실, 진리가 단순하다고 하는 까닭은 단지 "육체가 나다" 라는 고정관념에서 깨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육체가 나다'라는 앎과 '육체가 나가 아니다' 라는 앎은 둘 다 고정관념인 생각으로 본다면, 한생각의 차이이며, 이분법적 사고방식으로써의 분별심이기 때문이며, 상대적인 앎이기 때문이며, 명색의 동일시의 착각에서 비롯된 환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석가모니는 원리전도몽상에서 "깨어나라" 고 한 것이며, 예수 또한 순수의식의 어린아이와 같이 지식의 허구에서 "깨어나라"고 한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 는 말이다.

 

 

여기서 한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에 대한 해석은 여전히 진리가 아니라, 현시대 인간들의 자기를 주장하는 것과 같은 지식의 앎으로써 현시대까지도 여전히 논술, 언술을 겨루는 것들이 아닐 수 없으며, 그로써 다툼이나, 경쟁, 투쟁, 전쟁이 아닐 수 없는 것이며, 삶이 전쟁인 것과 같은 갈등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반면에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완전하게 이해 하는 진리의 앎에 바탕을 둔 가르침이며,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오직 일념법, 일념명상법으로써 자신의 마음의 실체를 찾는 일만이 가치 있는 삶이라는 말이며,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뜻이다. 

 

단지 여기서 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새로운 말이 있다면, '일념법, 일념명상법'이라는 말이다. 일념법은 자신의 내면에 간직된 진리를 드러내게 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며, 현시대의 가장 보편적인 언어로써 진리를 깨닫기 위한 유일한 길이다.

 

 

무지(無知)에 대한 지(知)의 가르침에서...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기는 모르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과 같으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그만큼 다른 사람에 비하여 얼마간은 지자(知者)일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는 말이 참으로 신비스러운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와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 있는데, '달마대사'와 순치황제와의 전설에서 볼 수 있는 말이다.

 

황제가 달마에게 묻기를... 나는 절간(사찰)도 많이 지었으며, 승려들을 많이 배출 했는데, 그렇다면 나의 공덕은 얼마나 있습니까' 라는 물음에... 달마 답하기를, 일언지하에 '無' 라고 했다는 말이다. 이 말에 황당하기만 했던 순치황제, 달마에게 다시 묻기를... 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는 질문이다. 그 질문에 답하기를 "나도 모릅니다" 라는 말이다. "내가 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는 뜻이며, '육체'는 '나(我)" 와는 상관 없는 것, 즉 석가모니의 말을 빌자면... '육체는 나도 아니며, 내것도 아니며, 나와 비슷한 것도 아니다' 는 '비아경'으로 전해지는 말과 같은 의미인 것이다.

 

"육체가 나다" 라는 착각(원리전도몽상)에서 벗어나야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내가 나를 안다고 생각하는데' 그들은 '내가 나를 모른다'는 말이다. 그러니 말도 안되는 소리이며,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람들의 '내가 있다, 내가 사람이다'는 앎에 대해서 당연하게 여긴다는 사실에 대해서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사실, 인간들의 '내가 사람이다'는 말... 근거 없는 낭설이기 때문이다. 

 

그들 또한 명색(名色)이 사람이다.

하지만 사실상, 사람은 '명색'으로써만 사람일 뿐, 본래 사람은 사람이 아닌 것이다. 어떤 것에 대해서 '까마귀' 라고 이름지은 것과 같이 '어떤 것'에 대해서 '사람'이라고 이름짓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인간은 순수의식, 무의식, 잠재의식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만을 주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며, 사실이 아닌 것에 대해서 사실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말을 배우기 이전의 어린아이들에게는 '내가 사람이다'는 말, 언어, 생각, 사고방식'이 없다는 말이며, 단지 타인들로부터 얻어진 지식에 의해서 '아상, 인상, 수자상, 중생상' 이라는 분별된 견해가 생겨난 것이다.

 

 

 엄격한 대화를 통해서 사람의 억단(臆)의 꿈을 깨뜨려 나갔다.

 엄격한 대화를 통해서 '가슴 億' 자와 '끊을 斷' 자... 의 "사람의 억단의 꿈을 깨뜨려 나갔다" 는 말...

 

플라톤의 입장에서 볼때 '엄격한 대화로써 사람의 억단의 꿈을 깨뜨려 나갔다' 라는 방식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들 또한 이분법적 사고방식인 지식의 앎으로 본다면... "엄격한 대화" 라는 말은... 사람들의 꿈과 희망을 깨뜨리는 말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엄격한 대화" 라는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지식의 한계 즉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초월한 말로써 단순한 진리를 전하는 말인 것이며, 올바른 앎일 때 비로소 행복을 경험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지식을 초월한 '진리의 앎'을 앎으로써 비로소 진정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들들의 모든 앎이 근거 없는 낭설에 대한 믿음일 뿐, 올바른 앎이 아니기 때문이다. '육체가 나다'라는 착각에서 깨어나야만, 노자의 말과 같이 무위자연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이며, 삶과 죽음이 본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일념법으로써 그런 지혜가 생겨나는 것이며, 석가모니의 가르침 또한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며, 예수의 말 또한 그러하다. 

 

 

결국은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시종일관하여 두려움 없이 자기의 소신을 말하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의 죽음과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해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해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은 동일한 사건이며, 그들의 주장은 자기의 소신이 아니라 인간세상에 '진리의 앎'을 전하기 위한 방편이다. 

 

사실. 인간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까닭은 죽음을 경험해서가 아니라, 남들로부터 얻은 지식으로써 두려워하는 것이다. 장날에 남들이 시장을 가니, 나도 따라가는 것과 같은 것이며, 죽음 또한 남들이 두려워 하기 때문에 '나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의 앎에 대해서 무지몽매한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세상의 모든 집단들은 '이합집산'들이 아닐 수 없다.

그 집단들이 '가족'이라는 이름이든, 정의라는 이름이든, 정치라는 이름이든, 사회사업이라는 이름이든, 회사라는 이름이든, 종교라는 이름이든, 대학이라는 이름이든, 학문이라는 이름이든, 교육이라는 이름이든, 미신이라는 이름이든, 과학이라는 이름이든, 명상이라는 이름이든, 심지어 깨달음, 진리... 라는 이름이든 모든 집단들이 그러하다.

 

 

사실, 인간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꿈과 희망을 쫒는 것 같다. 아득한 옛날부터 현시대까지도 그러하다. 하지만... 인간류의 역사가 그러하듯이 인간세상이 행복한 시대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류는 그런 사실에 대해서는 간과하는 것 같다. 아니. 가면 갈수록 인간들의 인간들간의 다툼이나, 논쟁, 논란들... 경쟁이나 투쟁, 전쟁.... 삶을 위한 전쟁은 더욱 더 치열해져만 간다.

 

그런데, 그런 사실에 대해서 올바른 인식조차 불가능한 것이 인간 지식이며, 무한한 어리석음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인간들의 삶이라는 것들... 인간이 인간이면서 인간들끼리의 치열한 전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하나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 전쟁 속에서 행복을 구하려 한다는 사실... 참으로 신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에 대해서 무지몽매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지식이 지식이 아니라, 무식이며, 무지인 것이다. 

그런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앎에 대해서 전하고자 했던 인물들이 소크라테스를 비롯하여, 예수와 석가모니이며, 노자와 장자 등인 것이다.

 

 

행복을 경험하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그대 자신의 마음이다.

세상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의 마음이 변해가는 것이다.

세월이 가는 것이 아니라, 그대의 마음이 변해가는 것이다.

마음이 없다면 세상이 없으며, 그대의 나 또한 없는 것이다.

 

그들의 말은 그들만의 주장이 아니라, 그대의 내면에 깊이 간직된 순수사고의 지혜를 드러내 보이는 말이다. 그대 또한 일념법으로써 자신의 진리를 볼 수 있다. 

 

인간세상이 평화롭기 위해서는 오직 개개인의 사념이 사라져 진리가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그대의 행복, 자유 평화 또한 그러하다.

그대의 '나 아닌 나' 그것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의 기원이기 때문이다.

 

일념법, 일념명상법이 진리이다.

왜냐하면 그대의 순수사고를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진리와 인연있는 이에게 영원한 평화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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