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
슬라보예 지젝 | |
이름 | 슬라보예 지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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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49년 3월 21일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류블랴나 |
시대 | 20-21세기 철학 |
지역 | 서양 철학 |
학파 | 슬로베니아 학파 |
연구 분야 | 정치이론, 독일관념론, 영화이론, 이론정신분석학, 포스트모더니즘 |
슬라보예 지젝[통용 표기](슬로베니아어: Slavoj Žižek 슬라보이 지제크 [ˈslavoj ˈʒiʒɛk] , 1949년 3월 21일~)은 유고슬라비아 출생의 대륙철학자이자 헤겔, 마르크스, 자크 라캉 정신분석학에 기반한 비판이론가이다. 지제크라고도 불린다. 그는 정치이론, 영화이론, 이론정신분석학에 공헌을 해왔다. 지젝은 현재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대학교 사회학 연구소의 선임연구원이며, 또한 유럽 대학원(영어: European Graduate School)의 교수이다. 또한 시카고 대학교, 컬럼비아 대학교, 런던협회, 프린스턴 대학교, 뉴욕 대학교, 뉴스쿨, 미네소타 대학교, 캘리포니아 대학교 어바인, 그리고 런던 대학교 버벡에 교환 교수로 재직했으며, 류블랴나에 있는 이론정신분석학회의 의장이다. 지젝은 대중문화에서 온 예시들을 라캉의 이론과 라캉의 정신분석학, 헤겔의 철학과 마르크스의 경제비판이론으로 사회현상을 해석한다. 그는 주체, 이데올로기, 자본주의, 근본주의, 인종주의, 똘레랑스, 다문화주의, 인권, 생태학, 세계화, 이라크전, 혁명, 이상주의, 전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대중문화, 오페라, 영화, 정치이론과 종교를 포함한 많은 주제에 대해서 글을 쓰고 있다.
지젝은 10대 시절부터 영어로 쓰여진 문학, 특히 탐정소설에 집중했다. 이 와중에 철학에 대한 관심을 키워 17세 무렵 철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류블랴나 대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첫 저서를 발간했고, 1971년엔 철학과 사회학 학사를 동시에 취득했다. 1975년에는 문학철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400쪽에 달하는 석사학위 논문 <프랑스 구조주의의 이론적, 실존적 타당성>을 통해 지젝은 자크 라캉, 자크 데리다, 줄리아 크리스테바,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질 들뢰즈 같은 프랑스 사상가들의 영향력을 분석했다.
지젝이 태어나고 성장할 당시 유고슬라비아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통치 아래에 있었다. 당시 동구 블록 속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공산주의 국가였지만, 후에 지젝이 지적한 것처럼 공산주의 체제가 국민에게 허용한 자유는 오히려 치명적 자기통제 형식을 국민들에게 심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었다. 반면, 국가통제의 한 측면으로 모든 영화사들은 배급된 영화 일체를 지방 대학 자료실에 제출해야했다. 이 결과로 지젝은 당시 배급된 거의 모든 유럽과 미국 영화를 볼 수 있었고, 그가 헐리우드 전통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갖추는데 도움을 주고 이후의 저술 활동에도 큰 도움을 끼쳤다. [1]
석사학위 취득 ~ 류블랴나 사회학연구소 시절[편집]
동료 철학자 믈라덴 돌라르에 따르면 당시 당국은 지젝의 카리스마 넘치는 강의가 학생들의 반체제 사상에 물들게 할지 모른다는 의심을 품었다고 한다. 이러한 정치적 혐의로 대학교수 자격을 다른 후보자에게 뺏긴 지젝은 별다른 직업 없이 유고슬라비아 육군에 복무하며 독일어 번역 작업으로 생계를 꾸려간다. 1977년 몇 친구들이 슬로베니아 공산주의 동맹 중앙위원회에 지젝을 추천하여 지젝은 지도급 공산주의 인사들의 연설문을 쓰고 철학 공부도 하게 된다. 이 몇 년 동안 지젝은 라캉의 이론을 연구하는 집단의 중심 인물이 되었으며, 류블랴나 이론 정신분석학회를 창립했다. 1979년 지젝은 류블랴나 대학교 사회학연구소에 직장을 얻는다. 대학교수 자리는 아니었지만 연구소는 수업의 부담과 관료주의의 압박이 없이 자신의 관심 분야에만 몰두할 수 있는 곳이었다. 지젝은 1981년 이곳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2]
파리 시절[편집]
1981년 지젝은 파리로 여행을 떠나서 그가 주로 논의하는 사상가들을 직접 만난다. 라캉은 1981년에 이미 죽어 만날 수 없었지만, 대신 그의 사위이자 프랑스 정신분석학의 좌장인 자크알랭 밀레르를 만난다. 또한 프랑수아 르뇨(프랑스어: Francois Regnault)와 함께 정신분석학을 공부했다. 밀레르는 지젝이 지적으로 발전하는데 큰 영향을 끼친다. 밀레르는 지젝에게 조교 자리를 알선해주고 또한 그의 분석가가 되었다. 하지만 1985년 지젝이 파리 제8대학교에서 정신분석학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받을 때 밀레르와의 관계는 막다른 골목에 부딪혔다. 밀레르는 지젝의 박사학위 논문을 호의적으로 옹호했지만, 논문 출판을 거부한 것이다. 지젝은 라캉 정신분석학 핵심 그룹 외부에서 출판을 해야했고, 이 좌절로 그는 고향인 슬로베니아로 돌아가게 된다. [3]
슬로베니아 귀국 이후~현재[편집]
슬로베니아로 돌아온 지젝은 《믈라디나(슬로베니아어: Mladina)》지의 고정 칼럼니스트로 활동한다.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민주주의적 저항의 거점이었던 믈라디나지에 기고하면서 지젝은 1990년 슬로베니아 4인 대통령[4] 후보로 출마한다. 자유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그는 아쉽게 5위로 그치지만 이듬 해인 1991년 슬로베니아의 과학 대사가 되어 정부 활동에 참여하게 된다. 이후로도 지젝은 슬로베니아 정부에 비공식적으로 충고하는 역할을 하는 한편 연구활동에도 전념하였다. 1989년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을 출간한 이후 지젝은 맹렬한 창작열로 영어로 된 십수권의 저서와 다수의 편집 서적을 펴냈다. 또한 독일어, 프랑스어, 슬로베니아어로도 다수의 책을 저술하였으며 그의 저작들은 한국어, 네델란드어, 일본어, 포르투갈어, 슬로바키아어, 세르보-크로아티아어, 스위스어로 번역 출간 되었다. 출판 작업 이외에도 지젝은 국제 강연회도 의욕적으로 개최하여 류블랴나의 사회학 연구소 이외에도 뉴욕 주립대학교 버팔로, 미니애필리스의 미네소타 대학교, 뉴올리언스의 툴레인 대학교, 뉴욕의 카르도조 로스쿨, 컬럼비아 대학교, 프린스턴 대학교, 뉴욕의 '사회 연구를 위한 뉴 스쿨', 1991년 부터는 앤아버의 미시간 대학교에 직위를 가지고 있다. 또한 슬로베니아의 '아날렉타' 시리즈 편집장을 맡고 있으며, 라캉 정신분석학과 마르크스주의의 결합을 도모하는 '그것이 있던 곳(독일어: wo es war)' 시리즈, 라캉을 통해 문화, 정치 분석을 시도하는 'SIC' 시리즈의 영어와 독일어 출판을 돕고 있다. 지젝은 오늘날 '광신도를 몰고다니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각광받는 사상가이다. [5]
2013년 3월 11일, 대한민국의 경희대학교는 지젝을 외국어대학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에미넌트 스칼러(Eminent Scholar·ES·저명한 학자)'로 임용키로 하고 통보 절차를 마쳤다고 밝혔다.[6] 2013년에는 대한민국을 방문했으며, 해고자 문제 해결과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위해 장기투쟁을 하고 있는 민주노총 금속노조 쌍용자동차 지부 조합원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사상[편집]
영향[편집]
지젝은 철학, 정치학, 정신분석학에서 다른 사상가의 영향을 받았다. 철학에서는 헤겔, 정치학에서는 마르크스, 정신분석학에서는 자크 라캉이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 우선 헤겔의 철학은 지젝의 사유 방법에 일정한 형태를 부여했고, 마르크스의 저작은 이론의 차원을 넘어서서 실천적 동기와 근거를 제공했다. 마지막으로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지젝이 사용하는 분석 용어와 개념적 틀을 제공했다.
헤겔[편집]
헤겔은 독일 관념론, 나아가 서구 관념론의 정점에 도달한 독일 철학자이다. 넓게 이해하여 관념 철학자들은 ‘사물들 혹은 물질적 세계는 정신이 그에 대해 갖는 관념들과 독립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런 전통 아래에서 헤겔은 개별 관념들이 하나의 절대 관념으로 통합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이것이 필연적이라고 했다. 헤겔은 그가 ‘총체성'(totality)라고 부른 세계 전체를 이해하는 방법으로 변증법적 사고를 전개 시킨다. 질문과 답변으로 지식을 얻는 변증법은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우선 한 테제/관념이 있고 다음에는 안티테제/관념의 구체적인 한정이 그에 대립된다. 마지막으로 이 둘은 하나의 종합이나 더 포괄적인 관념으로 통합된다. 이 과정은 완전한 진실(총체성)에 도달할 때 까지 계속될 수 있다. 지젝은 헤겔의 변증법을 독창적으로 읽어낸다. 헤겔 변증법은 관습적으로 더 큰 진리로 화해하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지젝은 변증법을 화해나 종합적인 관점이 아니라, 헤겔이 언급했던 ‘모순은 모든 동일성의 내적 조건’의 관점에서 이해한다. 이 명제를 통해 헤겔은 어떤 것에 대한 관념은 언제나 불일치로 분해되며, 이 불일치야 말로 그 관념이 애초에 존재하게 된 필연성임을 주장한다. 즉 지젝에게 진리란 차이가 매끄럽게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모순 속에서만 발견되는 것이다. ‘모순어법적 사유방식’이라 칭해지는 지젝의 특유한 사유방식은 지젝이 헤겔의 변증법을 받아들였다는 증거이다.
카를 마르크스[편집]
지젝은 스스로 “일말의 주저함도 없는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선언한다. 또한 마르크스가 비판한 내용을 확신하며 사회가 다른 방식으로 조직될 수 있다고 믿는다.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은 지젝에게 이데올로기를 비판해야할 이유를 설명해주며, 지젝은 자신의 작업을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을 바꿈으로써 다른 세계를 원하도록 만드는”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의 일부로 간주한다. 지젝은 이데올로기를 개인들이 사회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정의한다. 이 광범위한 정의는 이전에도 제기되었던 것이지만 어떻게 개인들에게 작동하게 되는지는 규명된 바가 없었다.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의 본능적이고 심리적인 과정 속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이 과정에 대한 이론을 발견해야 한다. 지젝은 자크 라캉에게서 그 이론을 발견한다.
자크 라캉[편집]
지젝은 라캉주의 정신분석학을 대중화시켰다는 공로로 칭송된다. 또한 그에게는 라캉해설가라는 수식어도 따라다닌다. 보통 정신분석학은 신경증환자를 치료하는 방법론과 심적 과정에 대한 이론들을 포함하는 지적 영역으로 협소하게 이해되었으나 라캉 이후로 정신분석학은 보다 광의의 영역으로 뻗어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지젝은 라캉의 개념을 나름대로 받아들여 전유시킨다. 라캉은 지젝에게 분석틀과 개념용어를 제공했다. 특히 상징계와 실재계 개념으로 지젝은 세계를 풀어낸다.
주요 개념 및 이론[편집]
주체[편집]
지젝은 코기토로 대변되는 자기완결적인 근대의 주체도 아닌, 완전히 해체되어 버려서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체도 아닌 역동적이며 저항적인 주체를 새로 확립하려 하였다. 이 작업에 동원되는 것은 역시 헤겔, 마르크스, 라캉이다. 지젝은 근대철학이 상정했던 자기완결적이고 충만한 주체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주체란 균열, 틈새, 단절을 내장한, 내적 불화를 겪는 주체일 수 밖에 없다. 그런 주체는 말 그대로 “까다로운 주체”이다. 하지만 이 주체는 자신의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행위를 책임지는 기능을 수행한다. 이런 입론에 기대어 지젝은 세계 질서에 변화를 가져올 행동의 주체를 불러일으킨다. [7]
포스트모더니즘[편집]
지젝은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을 주창하는 사상과들과 대립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주체를 해체함으로써 저항의 거점 또한 해체했다는 이유에서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데카르트의 코기토로 대변되는 주체가 인간을 해방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억압과 구속에 빠뜨렸다 말하지만 지젝이 보기에 근대적 주체의 극복은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이뤄져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지젝은 그들 나름의 성과를 보존하며 저항과 혁명의 주체를 새롭게 되살리려 시도했다. [7]
정치화[편집]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선언한 “이데올로기의 종언” 이후인 현재, 지젝은 정치 결정들이 정당화되는 방법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방법의 예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사회 보장 프로그램이 감소되는 일이, 정치적 담론을 위해 유효한 근거가 아니지만, 가끔 객관적 필요로서 사회에 요구 된다는 것이다. 지젝은 현재 늘어난 시민 참여에 대한 토론이나 문화적 부문에 의해서 제한된 정치적 목표은 결국 장기에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실체적인 수단이 고안되지 않은 것만큼이나 효과 없는 것으로 파악한다. 하지만 자본의 자유를 제한짓는 장치나 생산과정을 사회적 통제의 메커니즘에 종속시키는 수단들 또한 지젝은 해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이것들 또한 경제가 급진적으로 탈정치화되는 것이라고 본다. 지젝은 오늘날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시민들에 의한 정치 변화도, 역사사회주의에서 했던 것과 같은 통제 모두 해답이 되지 않는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현재 지젝은 '경제의 정치화'를 주장한다. 실로 오늘날 자유 사회의 강령이 된 “관용에 의한” 다문화적 충동은 치명적인 질문을 억압한다. 그 질문은 “어떻게 우리는 세계화의 현재적 조건에 정치의 순수한 장을 다시 소개할 수 있을까?”이다. 그는 또한 후기정치학(post-politics)에 대한 균형세력으로 정치의 정치화에 찬성한다. 민주적인 맥락을 만들어내는 정치적 결정의 영역에서 지젝은 양당제를 비판한다. 양당제는 후기정치학 시대에 일부 국가에서 지배적인 정치형태이다. 또한 이는 선택의 가능성이 명시적으로 실제 존재하지 않는다는 형태로 존재한다. 즉 양당제는 실제적으로 정치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방법을 가로막는다.
그러므로 정치화는 지젝에게 언제나 “특별한 요구가 불가능한 보편성의 대표자로서 기능하게 시작하는 점이다.” 지젝은 계급투쟁을 자본을 통한 사회적인 위치인 국지적이고 객관적인 결정으로 파악하지 않고, 급직전인 주체의 안에 놓인 것으로 파악한다. 프롤레타리아는 “육화된 모순’이다. 오직 정치 투쟁에서 개별주의를 통해서만 어떤 보편주의도 등장할 수 있다. 노동자들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일은 종종 신용을 얻지 못한다. 노동자들은 그들의 이익을 바라며 투쟁을 시작하지 전체를 위해 싸우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문제는 후기정치학의 시대에 어떻게 정치화된 정치학을 세우느냐이다. 은유적 응축으로 행동하는 개별적인 요구는 그러므로 개별적 요구의 초월적인 것과 사회 뼈대의 순수한 재건축을 겨낭할 수 있다. 지젝은 자크 랑시에르를 따라 사회의 짜여진 구조와 “위치 없는 위치”를 배제한 자리에 진정한 정치적 갈등이 자리한다고 본다.
사회는 사실 쉽게 계급에 의해서 나뉘지 않고 그러므로 계급은 단순한 구조적 특질이 없다는 사실은 투쟁의 신호이다. 반면 계급 대립은 상징화로 완성될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동시에 불가능하지도 현실화되지도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지젝의 해답은 경제의 급속한 재정치화(再政治化)이다.
무신론[편집]
지젝은 강고한 무신론자이다. 2006년 지젝은 뉴욕타임즈에 ‘무신론은 유럽의 위대한 전통’이라며 기고했다. 그리고 유럽 대륙에서 무신론이 유럽 대륙에서 더 널리 알려지길 바라는 그의 지지를 표명했다. 또한 지젝은 종교 타파를 주장하며 “교회는 곡물 저장고(사일로(silo))나 문화의 전당으로 바뀌어야만 한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이 언명은 지젝이 하는 습관적인 농담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지젝은 《꼭두각시와 난쟁이》(The Puppet and the Dwarf), 《믿음에 대하여》, 《깨지기 쉬운 절대성》과 같은 신학적, 종교적인 것들을 재해석하는 많은 글들을 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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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세계를 이해 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들의 지식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지만, 정작 자신의 마음 조차 이해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신과 우주, 세상을 사실 그대로 올바르게 이해 하는 것이며, 타인들의 마음 또한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인간들의 지식으로써 인간세상이 평화로울 수 있었다면, 위의 사례들과 같은 논란은 사라졌을 것이다.
인간들의 지식의 무한한 어리석음이 아닐 수 없는 까닭은 개 개인 자신들의 앎이 '스스로 아는 것'이 아니라 남들을 의존하여 아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인식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名色이 철학자라면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 는 말에 대해서 만이라도 이해 해야만 하는 것이다. 사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지식을 주장하지만... 진정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것은 단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의 모든 앎들은 자신이 스스로 알게된 것이 아니라 남들로부터, 남들을 의존하여 얻어진 것들이다. 사실 자신의 '자존심' 이라는 마음조차도 '스스로 깨달아 아는 것'이 아니라 남들로부터 얻어진 지식으로 구성된 것이다.
지금 이 글을 보는 그대의 마음 또한 그러하다.
그대가 기억할 수 없는 어린아이시절부터, 남들로부터 얻어진 지식의 일부분에 대해서 '내 마음' 이라고 단정 짓는 것이다. 사실 그대의 마음은 그대의 '내마음'이 아니라.... 여러 남들의 마음인 것이다.
[그대의 마음 = 남들의 마음(지식)] 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너 자신을 알라' 고 하는 것이며, 남들을 의존하여 얻어진 마음이 아니라, '스스로 깨달아 아는 마음'으로... 이름하여 진리의 앎으로 거듭 나라는 것이다.
지식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식은 근거가 없는 것에 바탕을 둔 것이기 때문이다.
지식은 언어이며, 언어의 근원에는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남들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아는 앎'을 얻기 위한 방법이 있다.
이름하여 '일념법, 일념명상법' 이다.
인연있는이에게, 그 길을 전하는 유일한 곳이 '도가' 이다.
일념명상의 집 '도가' 에서 ---> http://blog.daum.net/powwr1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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