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학(精神分析學, Psychoanalysis)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의해 시작된 심리학의 한 갈래로, 인간의 행동양식을 내적인 욕구의 충돌 및 조화의 표출로 판단한 것으로, 이러한 내적 욕구와 외부의 사회적 요구가 조화될 때에는 문제가 없지만 조화되지 않을 때에는 정신적 질환으로 나타난다고 간주한다. 이러한 욕구는 프로이트는 성적인 것으로 이해하였지만 모든 정신분석학자들이 이에 동의하지는 않으며, 학자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분석한다.
개요[편집]
정신분석학이 심리학과 구별되는 지점은 '무의식'의 연구 여부이다. 심리학은 일반적으로 의식의 영역의 구조와 행동 방식에 대하여 연구하지만, 정신분석학은 의식에서 억압된 감정과 욕망, 생각 등이 모이고 인간 행동과 사고의 근본을 이루는 무의식의 영역에 대하여 연구하는 학문이다.
프로이트는 의식의 세계에서 인지할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여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무의식에 대하여 발견하고 그 무의식의 구조에 대하여 연구했다. 처음에 프로이트는 지형학적 모델로 무의식의 구조를 설명했다. 우리가 인식하는 정신의 바깥-땅 위의 표면과도 같은-에 의식이 존재하고, 그 밑에는 지금 당장 인식하고 있지는 않지만 언제든 다시 생각을 꺼내올 수 있는 전의식-땅 밑의 지표-이 존재한다. 전의식에서 한층 더 깊이 경계를 넘어 들어가면 의식에서 억압된 무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이 지형학적 모델의 요지라 할 수 있다. 차후에 프로이트는 이러한 지형학적 모델을 역동적 정신 구조론으로 보다 구체화시키는데, 이것이 익히 알려진 자아(ego)-초자아(super ego)-이드(id)의 3원적 기능이다.
프로이트가 창시한 초기의 정신분석학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비롯한 3자 관계(아동-어머니-아버지)와 성적 역동성에 주된 초점을 맞추었으나 후대의 정신분석가들로부터 비판받으며 다양한 갈래로 성장해 나가고 있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이지만 프로이트의 이론이 정신분석학의 전부를 이룬다고 말할 수는 없다. 프로이트 자신도 정신분석학의 골격을 세우는 데 있어 여러가지 이론을 세웠다가 스스로 그것을 폐기하기도 하였고, 후기에 가면 학문적 입장이 변화하기도 한다. 이것은 다윈의 《생물학》을 현대 생물학과 같다고 볼 수 없으며, 뉴턴의 《물리학》이 곧 현대 물리학이라고 간주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프로이트 사후에는 프로이트의 친딸 안나 프로이트를 비롯한 자아심리학파와 멜라니 클라인의 대상관계학파가 생겨나 맞서기도 하였으며, 프랑스의 철학자/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에 의해 정신분석학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았다.
프로이트[편집]
정신분석은 모든 정신의학 이론의 근간이 되며 현재 프로이트 학파 정통 정신분석연구소 연수생들은 후학을 양성하며 치료에도 심혈을 기울인다. 정신분석학은 이른바 인생대학과도 같이 올바르게 내면의 통찰을 도우며 그 통찰을 자신의 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적용하게 돕는다. 마음 중심의 사고방식을 가진 자에게 최고의 만족을 선사하는 과학적 사고방식을 도구로하여 무의식을 탐구하고 깨닫는 과정이 정신분석이다. 흔히 정신치료자들이 정신분석을 억지이론으로 폄하하나 그들 역시 정신분석 이론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론을 토대로 치료하며 실제로는 기본적 수준의 치료만을 할 수 있는 치료자들이 내세우는 억지 비판이다. 또한 정신분석은 의사나 환자의 관계가 동등하여 주입식이 아닌 토론이나 대화의 형태에 가깝다.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무의식이란[편집]
사람의 의식은 빙산의 일각이며 무의식에 의해 지배 당하는 삶을 살지만 무의식을 의식의 영역화하여 보다 주도적인 삶을 살고 무의식을 컨트롤하자는 취지다. 무의식을 의식화 하기 위해 자아의 강도(ego strength)가 강해야 무의식적 저항을 다스려 의식의 영역을 넓히고 분석작업을 이어갈 수 있다. 하여 일반적으로 정신병 환자가 아닌 신경증 환자를 대상으로 삼아 치료를 시도한다. 무의식의 힘은 상상을 넘는 정도라 분석 후 임신이 가능해지거나 신체적 변화가 생겨 직업을 정신분석가로 가지게 된 사례도 있으며 무의식의 힘도 놀라우나 폐해도 만만찮다. 부모를 잘못 만나 부모와 따로 살면서도 그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불행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는 상황이 정신분석이 필요한 대표적 증상이다. 대부분 무의식의 존재를 감지하지 못하며 이런 사람은 분석의 효과도 없고 어느 정도 지능과 사고력이 있어야 분석의 효과를 본다.
비판[편집]
과학철학자 칼 포퍼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반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과학일 수 없다고 보았다. [1] 아돌프 그륀바움은 정신분석학은 반증가능하며, 사실상 틀렸음이 증명되었다고 주장한다. 비판자들과 옹호자들간의 논쟁은 때때로 매우 격렬해져서, 이러한 논쟁들은 "프로이트 전쟁"으로 불린다. 현재 행동주의자들, 진화심리학자들, 인지심리학자들은 정신분석학을 의사 과학으로 취급한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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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개개인 인간들은 누구나 사상가(思想家)이자 동시에 몽상가(夢想家)이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낱말 하나가 '사상가, 몽상가' 라는 낱말이 '사상자, 몽상자' 가 아니라 '사상家' 라는 낱말로써 '집 가' 자로 표기됨으로써 '그런 부류'들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사실, 고대, 중세, 현대의 모든 사상가들의 논리는 그런 사상가들의 몽상일 뿐, 쓸모 없는 것으로써 '탁상공론'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지식은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을 올바르게 아는 것은 단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 고대, 중세, 현대의 모든 사상가들의 논리는 시작도 끝도 없는 논쟁일 뿐, 인간 삶에 이익이 되는 것은 단 하나도 있을 수 없다. 그런 사상 따위들보다는 차라리 '억지로라도 인간들을 웃게 하기 위해서 궁리하는' 개그맨들의 노력이 더 훌륭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상가들... 쓸모 없는 것들이다.
만약에 인간의 지식으로써 가장 뛰어난 지식이 있다면... 코미디언들이나, 개그맨들의 지식인 것 같다. 왜냐하면 인간들의 앎이라는 모든 지식은 문제만 양산하는 것일 뿐, 본래 해답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답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올바르게 아는 것에 대해서 '진지眞知' 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며 더 나아가 우주의 근원과 생명의 비밀을 이해 하는 것에 대해서 '진리(眞理)' 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다.
사실, 인간들의 고대, 중세, 현세에 이르기까지의 지식을 모두 종합해 볼때, 진지의 지식을 얻었던 인물이 있다면 오직 소크라테스를 비롯하여 노자와 장자 등이며, '진리'의 경지에 이르렀던 인물들이 있다면 '석가모니와 예수' 이다. 왜, 굳이 석가모니와 예수를 '진리'라는 말로 표현하느냐 하면, 오직 그 둘만이 '진리'를 얻기 위한 방법에 대해서 까지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아는 것" 이 올바른 앎이라는 방식으로...
다만 인간의 관념, 지식으로써 그들과 같은 올바른 앎, 진지, 진리를 구할 수 없는 까닭은 지성체들의 오만과 독선, 무한한 어리석음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리, 진지를 얻는 방법에 대해서 까지도 분명히 설명 했기 때문이다.
지금 다시 그 방법, 즉 지식을 넘어선 올바른 앎을 얻기 위한 방법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상가라는 인간들의 지식은 남들을 의존하여 아는 것이다. 그리고 '진지, 진리'의 앎 또한 처음에는 남들을 의존하여 아는 것인 '지식'으로 출발된다는 점은 고대나, 중세, 현시대의 사상가들과 똑 같다. 다만 진지, 진리를 증득한 인물들은... 인간 삶에 회의를 느낌으로써 다른 지식을 갈망하게 되는 것이며, 결국 "남들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아는 앎으로써" 지식을 초월한 '진지, 진리'의 앎을 얻게 되는 것이다.
지식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아는 앎'으로써 '자아의 완성'을 이루었다는 점에서는 석가모니와 예수를 비롯하여 소크라테스와 노자, 장자 등은 모두 동등한 앎으로써 '진리' 인 것이다. 어떤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인간들이 그들을 호칭함에 있어서 '이룰 成' 자와 '사람 人' 자로써의 '성인'이라는 이름을 짓게된 것이다. 그들은 '성스러운 聖' 자의 우상으로 숭배하는 성인이 아니라... '스스로 아는 자'로써의 '스승'이라고 아는 것이 올바른 앎인 것이다.
사실, 진리는 단순하다.
진지를 얻는 방법 또한 단순하다.
사실 지식을 얻는 일 보다도 더 단순한 것이 진리를 얻는 방법이다.
왜냐하면 지식은 죽는 날까지 남들의 지식을 의존하여 다른 지식을 쌓는 것이지만, 진리는 남들의 지식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들의 지식을 사량분별로써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에게 묻고 배우고 익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묻는 방식으로써 스스로 깨달아 아는 앎이 진실된 앎이기 때문이다.
지식은, 자신의 마음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까지도 남들의 지식에 의존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하나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사실, 마음 또한 지식과 같이 남들의 지식을 의존하여 아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 조차도 남들의 마음을 의존하여 알려고 한다는 것은... 말은 말이지만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만약에 그대가 자신의 마음을 남들의 지식에 의존하여 알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자신의 마음이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 남들의 마음이라고 자인하는 것이다. 그대가 설령 진리에 대해서 무지하다고 하더라도, 이런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 진정 자신의 마음이라면...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말이며, 자신이 스스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창조된 것이며 사실 석가모니의 말과 예수의 말 또한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진지를 이해 할 수 없는 지식에 의해서 왜곡되고 변질된 것이며, 우상숭배사상으로 전락된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 는 말... 남들을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자신에게 묻는 자아탐구를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그 유일한 방법이 '일념법, 일념명상법' 이며, 현시대의 가장 보편적인 언어로 설명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지식과 진리에 대해서 정리하고 정신분석학, 심리학에 대해서 설명하자.
'탐구' 라는 말이 있다. 사전의 설명이 아래와 같다.
탐구 (探究)【명사】【~하다|타동사】 진리나 법칙 등을 더듬어 깊이 연구(硏究)함.
"찾을 探" 자와 "연구할 究' 자로써의 '탐구' 이며, 진리나 법칙 등으리 더음어 깊이 연구함이라는 뜻이다.
지식이 탐구하는 것은 지식을 탐구하는 것이며, 남들의 지식을 탐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진지, 즉 진리의 앎은 그런 남들의 지식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지식을 탐구하는 '자신의 마음'을 탐구하므로써 얻어지는 앎인 것이다. 지금 이 글을 보는 그대 또한 지적으로나마 이해 할 수 있다. 자신의 마음이 본래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 어린아이시절부터 남들의 지식을 받아들임으로써 얻어진 것이며, 남들의 지식으로 구성된 것이 자신의 마음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그리고 더 나아가 '마음이 있다'는 생각과 '마음이 없다'는 생각이 단지 한생각의 차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자아탐구를 통해서 자신의 마음의 실체를 깨달아 알라는 말이다. 남들을 의존하여 아는 것은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들의 지식, 사상 따위들에 대해서 무지이며, 무식이며, 더 나아가 우주보다 더 무한한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까닭은, 인류의 성인이며, 고대 철학자로 알려진 소크라테스의 말이 곧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핵심 또한 '스스로 아는 것'이 올바른 앎이라는 말로써 '자아탐구'를 실천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며, 예수의 말 또한 '네 안에 하나님'이 있다는 말로써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상가라는 무리들... 그것들은 그들의 말은 들으려 하지 않고... 오직 올바른 앎이 아닌 자기의 지식 따위를 주장하는 어리석은 것들이다. 그것들이 서로가 '사상가'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의 알음알이에 대해서 '각설이 타령' 보다 더 쓸모 없는 것들이며, 사상가가 아니라 망상가, 몽상가라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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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비판의 내용을 보니.
과학철학자 칼 포퍼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반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과학일 수 없다고 보았다. [1] 아돌프 그륀바움은 정신분석학은 반증가능하며, 사실상 틀렸음이 증명되었다고 주장한다. 비판자들과 옹호자들간의 논쟁은 때때로 매우 격렬해져서, 이러한 논쟁들은 "프로이트 전쟁"으로 불린다. 현재 행동주의자들, 진화심리학자들, 인지심리학자들은 정신분석학을 의사 과학으로 취급한다.
만약 지금 이 글을 보는 그대가, 이곳에서 제시하는 '일념법, 일념명상법'으로써의 자아탐구로써 '일념'이라는 낱말의 뜻에 대해서 올바르게 아는 앎, 즉 자신의 생각의 흐름이 자신의 의지로써는 멈출수 없는 것이며, 더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올바르게 이해 하게 된다면... 인간들의 지식이 지식이 아니라 무지라는 사실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있게 된다. 그때 비로소 인간세상 모든 지식들이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허구적이라는 사실에 대한 올바른 알으로써 진리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인간들의 모든 언어 자체가 논쟁이 아닐 수 없다. 그 이유는 지식은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지만 사실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는 완전하게 무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식은 자신이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사실 조차도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주장하는 것이며, 프로이트 전쟁이라는 말과 같이 인간세상, 인간들의 삶 자체가 전쟁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인간은 지식으로 구성된 것이기 때문에 '지성체'이다.
그리고 지식은 다른 특별한 것이 아니라 단지 두뇌에 저장된 언어이다.
두뇌에 저장된 언어가 많은 것에 대해서 지식이 많은 것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며, 두뇌에 저장된 언어의 양이 적은 것에 대해서 지식이 없는 것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식으로써 올바르게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지성체는 '몸'에 대해서 '나' 라고 한다. 그리고 지성체는 그 '몸'을 분석할 수 있겠지만 몸의 근본원인 물질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하는 것 같다. 지성체는 이와 같이 근본원인 물질이 없는 것에 대해서 나'我'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 라는 생각이 없다면... '몸'은 없는 것이다. 두뇌에 저장된 모든 낱말들, 언어는 '생각'이라는 낱말에 포함된 것이다.
언어가 없다면, 즉 생각이 없다면... 나, 우주, 자연은 없는 것이다, 는 말이다.
가령 지성체는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말에 대해서 의심이 없다.
자신이 생각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아니, 무슨 생각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은 그만큼 자유자재한 것 같지만 사실, 지성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 적이다. 사실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에 이끌려 다니는 것이다.
그대는,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죽음 이후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다. 그대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본무本無' 즉 본래 아무것도 없는 것' 이다. 물론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는 말도 없으며, 그런 생각도 있을 수 없다. 죽음 이후의 생각 또한 그러하다. 그런데 신비스러운 것은 그대가 깊이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똑 같은 현상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던 생각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이 그러하다. 그곳에는 '나, 마음, 우주, 자연, 천지만물'이 없다. '없다는 것' 도 없다. '없다는 것도 없다'는 말도 없다.
그대의 두뇌에는 수많은 생각(언어, 낱말)들이 저장되어 있다. 단지 수많은 언어들이라는 말로써는 턱없이 부족하다. 밤하늘의 별들의 숫자보다 더 많은 낱말들이 저장되어 있지만... 그대가 기억할 수 있는 생각들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설령 그대가 기억할 수 있는 생각들을 기억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현제를 산다고 하더라도... 지성체는 현제를 경험할 수 없다. 그렇다, 사실 인간은 무의식에 의해서 행위되어 지는 것이며, 그것에 대해서 의식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정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것은 뇌세포에 저장된 언어에 한정된 것이다. 언어 밖에서 본다면... 언어가 없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 또한 두뇌에 저장된 언어에 한정된 것이며, 두뇌에 저장된 생각들이 모든 것이다. 두뇌에 저장된 생각이 없다면... 본 무 로써... 아무것도 없느 것이며, 자신의 나, 우주, 천지만물들 또한 없는 것이다.
천지만물이 있어서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언어가 있기 때문에 천지만물이 있는 것이다. 그대의 뇌세포에 '천지만물'이라는 낱말이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면... 천지만물을 인식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의식의 영역이라는 말 또한 그러하며, 정신이라는 말 또한 그러하다.
'자아, 초자아, 이드' 라는 말 또한 그러하다. 그런 낱말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말에 대해서 상상할 수 있는 것이지, 자아, 초자아, 이드.. 가 있어서 그것의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정신 또한 그러하다. 정신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어떤 것에 대해서 '정신'이라는 낱말,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의 작용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에 '정신'이라는 이름, 언어, 낱말을 창조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의식'이라는 낱말 또한 그러하다. 어떤 사실적인 것에 대해서 의식이라는 이름이 지어진 것이 아니라, 마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에... '의식'이라는 말을 창조해 내게 된 것이며, 무의식 또한 그러하다. 마음이라는 말을 창조한 까닭 또한 '어떤 실체'에 대해서 지은 이름이 아니라... 자신의 '나'를 모르기 때문에 창조된 이름인 것이다.
그대의 '나' 가... '나가 아니다' 라고 안다면, 그렇다고 가정한다면... 그대의 '나'와 관련된 모든 언어(말, 낱말들)는 불필요한 것이다. 아니, 쓸모 없는 것이다.
설령 '무의식'이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이 있는 것이 아닌 까닭은 인간은 그것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있지만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무의식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의식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어떤 것은 의식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며, 어떤 것은 무의식이라고 주장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지성체는 경험이전의 사고에 대해서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이 있다지만, 마음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어떤 과정을 통해서 가공된 것인지 이해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의 지식에 대해서 무지하고 하는 것이며, 올바른 앎이 겨자씨 만큼도 없다는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지식의 앎과 '진지, 진리'의 앎의 차이는 단순하다.
그대의 모든 앎, 인간들의 모든 지식은 서로가 남들을 의존하여 아는 것들이며, 진리, 진지의 앎은 오직 자신의 자신만의 스스로 깨달아 아는 앎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그대의 진정한 행복과 자유, 평화... 지식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 안에 있는 것이다.
그대의 자신에 대한 주장은 남들을 의존하여 얻은 지식으로써 자가을 합리화 시키려는 수작안 것이며, 무한한 어리석음의 소치인 것이다.
무지에서 진지로 깨어나라.
오직 스스로 깨달아 아는 진리의 앎이 유일한 행복과 자유, 평화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의 자유와 평화는 오직 일념법, 일념명상법으로써만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다.
인연있는이에게 영원한 평화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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