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과 중도 · 방편설 - 말변사

나는 누구인가 / 마음과 깨달음 그 오해와 진실 - 10) 법성계로 본 '부처' 와 '중생' / 유위법과 무위법 / 무진보란?

일념법진원 2014. 9. 4. 05:44

의상대사의 '법성계'의 내용을 보니. 부처. 깨달음. '도' 에 대해서 잘 설명되고 있다. 

 

이 글을 바탕으로 그 깊은 뜻에 대해 이해 할 수 있기를...

 

화엄일승법계도 華嚴一乘法界圖 ────────────────────────

법성원융무이상 法性圓融無二相 법성<진여>은 원융하여 두 모양이 없고

제법부동본래적 諸法不動本來寂 모든 법은 움직이지 않고 본디 고요하니,

무명무상절일체 無名無相絶一切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으며 일체가 끊겨

증지소지비여경 證智所知非餘境 깨쳐서 알 뿐 이지, 생각으론 알 수 없네.

진성심심극미묘 眞性甚深極微妙 진성<법성>은 깊고 깊어 지극히 미묘해

불수자성수연성 不守自性隨緣成 자성을 따르지 않고 인연을 따라 이루네.

일중일체다중일 一中一切多中一 하나에 일체 있고 일체는 하나에 있으며

일즉일체다즉일 一卽一切多卽一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그대로 하나다.

일미진중함시방 一微塵中含十方 한 개의 티끌 속에 온 우주를 머금었고

일체진중역여시 一切塵中亦如是 낱낱의 티끌 마다 온 우주가 들어 있네.

(3) 무량원겁즉일념 無量遠劫卽一念 무량겁 끝없는 시간이 이순간 생각이요

일념즉시무량겁 一念卽是無量劫 한 생각이 바로 한량 없는 시간이라네,

구세십세호상즉 九世十世互相卽 과거 현재 미래가 이 순간 어울려 있으나

잉불잡란격별성 仍不雜亂隔別成 그 본질은 뒤섞이지 않고 명료히 있다네.

초발심시변정각 心時便正覺 초발심 할 적 그대로가 부처의 마음이요

생사열반상공화 生死涅槃常共和 나고 죽는 깨달음의 바탕은 한 덩이라네.

이사명연무분별 理事冥然無分別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은 다르지 않으니

십불보현대인경 十佛普賢大人境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과 성인의 경지네.

 

(2) 능인해인삼매중 能人海印三昧中 부처님이 해인삼매samadhi禪定중에

번출여의불사의 繁出如意不思議 뜻대로 부사의한 법을 환히 드러내시고,

우보익생만허공 雨寶益生滿虛空 중생에게 보배로운 비가 허공에 가득하니

중생수기득이익 衆生隨器得利益 중생들은 각각 근기에 따라 이익을 얻네.

 

시고행자환본제 是故行者還本際 이런 고로 수행자는 본래자리로 돌아갈제

파식망상필부득 叵息妄想必不得 망상을 쉬지 않고선 절대 얻을 수 없다네.

무연선교착여의 無緣善巧捉如意 분별없는 이 좋은 방편 뜻대로 휘어잡아

귀가수분득자량 歸家隨分得資糧 근본자리 돌아감에 분에 따라 덕을 얻네.

이다라니무진보 以陀羅尼無盡寶 이 다라니<總持>의 한량이 없는 보배로

장엄법계실보전 莊嚴法界實寶殿 온 법계의 보배궁전을 실지로 장엄하여

궁좌실제중도상 窮坐實際中道床 마침내 실제의 법상 중도자리에 앉으니

(1) - 구래부동명위불 舊來不動名爲佛 예부터 움직이지 않아 부처라고 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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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법성계'에 기록된 말들. 중요하지 않은 말은 단 한구절도 없다.

그리고 타 경전들에 비해 모든 면에서 가장 적절한 표현이다.

법성계의 해석을 통해서 이곳. 카페에 설명된 모든 말들에 대해서 다시 한번 요약 설명하려 한다.

 

첫째. 마지막 구절의 "구래부동명위불" 이라는 말이다.

 

한자로 '부처' 로 표기 되면서 '붓다, 불성' 성령' 등으로 불려진다. 그것의 다른 이름이 '도' 이며, '중도'라는 말로 표현된다. '중도'라는 말은 '도'의 중앙이라는 뜻이다. 선함과 악함의 중간이 아니라.... 모든 법의 '중앙'이라는 뜻이며, 모든 법의 근원'이라는 뜻이다. 모든 법의 끝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의 '부처' 라는 말에 대한 이해는 모두 오해이다.

다만 일념을 깨닫고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만이 이해가 가능한 말들이다.

 

분명히 이해 해야 할 것은 '부처'라는 말의 본래의 뜻이... 본래, 옛부터 움직임이 없기 때문에 '부처'라고 이름짓게 된 것이다'는 말이다. 노자는 '그것의 이름을 '도'라고 짓겠다' 고 했다. '그것'이라는 말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언어로 표현될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그 말이 '구래부동명위불'이라는 말로써의 '부처'이다.

 

 

사실 '부처'라는 말은 어떤 사람을 단정 짓는 말은 아니다. '움직임이 없는 것'이라는 뜻으로써 '도'와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물론 사람들은 '부처'가 있다고 믿는다. '부처'를 이룬 사람이 있다고 믿으며, 석가모니가 유일자라고 믿는다.

상관 없는 일이다.

이곳의 설명들로써... 그대가 그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법성계' 내용을 보니. '법성계'를 쓴 사람 또한 '석가모니'와 같이 '도를 깨달은 사람'이다. 다만 그들의 행적이 묘연하다. 그들의 말들로써는 중생들이 이익을 얻은 것은 없는 것 같다. 물론 석가모니의 말로써도 사실 중생들이 이익을 얻은 것은 없다. 말, 말, 말만 무성하여 시시비비꺼리만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물론 석가모니의 탓이 아니라, 중생들의 알음알이 탓이다.

 

석가모니의 말로써 이득을 얻을 수는 없다. 이미 그 본질이 우상숭배사상에 의해서 완벽하게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의 글들로써 환상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사실적으로 크나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곳의 모든 글들이 석가모니의 말과 같은 말이며, 예수의 말과 같은 뜻이며, 노자의 말, 소크라테스의 말들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중생의 견해로 볼때, 사람들의 관념으로써만 '부처'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일념법으로써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 뿐이다. 사실 도를 깨달은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당사자들에게는 깨달았다는 생각이 없다. 그것은 그져 본래 있던 것이며, 새롭게 얻은 것이 아니며, 없던 것을 새로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육체가 나다, 육체가 나가 아니다'는 앎이 상대적인 분별일 뿐, 사실적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것 뿐이다. 

 

그는 스스로 중생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만큼은 분명히 안다. 더 이상 알아야 할 것이 없을 뿐이다. 그가 보기에는 사실 '본래무일물' '본무'이다. 만상만물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모두 중생이다.

 

 

사람들은 '육체가 나이며, 마음이 나이며, 느낌이나 감정 등의 생각'에 대해서 '나(我)' 라고 한다. 반면에 그들은 '그것들'은 나가 아니라고 할 뿐이다. 그것들이 '나'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말들... 일념을 깨달아야만 지적으로나마 이해가 가능할 수 있는 말이다. 단지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육하원칙에 어긋나지 않은 말이며, 언어의 근원에 바탕을 둔 말이다. 

 

간혹 하나님의 말씀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하지만 그 '말씀'이라는 말은 '육하원칙'으로 따져보더라도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이다. 누군가로부터 들어서 아는 말에 대해서 주장하는 것이다. 가장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며, 그런 류의 광신자나 맹신자들이다.

 

 

지성체는 '문화'로써 정신적인 소득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문화란 학문이나 예술, 종교, 도덕 따위의 지성체들의 모든 앎을 총칭하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들로써 정신적인 소득을 얻어서 행복한 사람은 없다. 종교들 또한 그러하다. 예수를 숭배하고 석가모니를 우상으로 여겨서 정신적인 이익을 얻을 수는 없다. 만약에 종교로써 이익이 있다면... 종교들간의 갈등이나 종교 전쟁으로 보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이익이라고 주장한다면... 어불성설이다. 종교들의 서로가 진리라는 주장들...  여전히 갈등이며, 서로가 죽고 죽이는 이념전쟁이 그 결과이기 때문이다. 

 

 

'범성계'에 보니. '능인(能人)'이라는 말이 있다. 

'전지전능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뜻이다. 유일자라는 뜻이며, 절대자라는 뜻이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나 아닌 나'를 체득한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하지만. 체득한 사람은... 없다. '나는 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까닭은 '언어가 상대적'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능인이. 도인이.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전지전능한 부처님(움직임이 없는 것=마음이 없는 것)이 '해인삼매'중에 불가사의한 법을 드러내 보이니. 보배로운 비가 허공에 가득하여... 중생들은 각각 근기에 따라서 이익을 얻는다'는 말이 있다. 

 

 

우상숭배로써 이익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의 가르침에 따른 올바른 앎으로써 이익을 얻는다는 뜻이다.    

인류 역사로 볼때, 지성체들의 문화에 바탕을 둔 물질문명으로써 정신적 이익을 얻은 것은 없다. 먹을 꺼리가 풍부해 졌으나, 아득한 옛날과 같이 여전히 굶주리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 소위 '능인'들의 말들로써 정신적인 이득을 얻은 사람도 없다. 서로가 옳다는 주장만 난무하여 날카로운 대립으로써의 갈등만 조장할 뿐이며, 결과는 전쟁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현상계를 말하는 것이다.

 

 

요즘. 하근기 중생들의 견해에 대해서 설명한 바 있다.

'중생들은 각각 근기에 따라서 이익을 얻는다'는 말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말, 말, 말로만 이익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현시대까지도 그들의 말들로써 이익을 얻은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다. 광신자나 맹신자들 또한 이익을 얻은 것이 없다. 하근기나 중근기들에게는 이득이 없다. 그들은 이득이 있다는 말, 말, 말에 묶여 있을뿐, 사실적으로 이득을 얻은 것이 없으며, 무엇이 정신적이거나 육체적으로 이득을 얻는 것인지 조차 이해 할 수 없다. 

 

지금부터 그 '무진보'라는 말로써 표현된 '큰 이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설명하려는 것이다.  

 

 

'무진보'라는 말이 있다. 

무궁무진한 보물이라는 말이다. 

그들(능인, 부처, 도인)의 말을 올바르게 알아들으므로써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귀한 보물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환상적인 말이 아니라, 사실적인 말이다. 그대가 지금 처한 현실에서 경험할 수 있는 말이다.

 

그 보물 중에 가장 큰 보물은 물론 '일념법. 일념명상붑'으로써 '일념의 무념처'에 다가갈 수 있으며, 스스로 '그것'을 보는 것이 첫째이며, '그것(능인, 부처)'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된다는 것은 '그것'이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앎(識)'이다. 오직 '그것'만이 남겨지기 때문이다. '그것'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의 기원이기 때문이다. '앎(識)'만이 남겨지며, 그 '앎'은 '그것' 이라는 말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지금 그 '앎'을 전하는 것이다.

 

 

지금. 두권의 책 '비밀의 언어' '깨달음의 실체를 밝힌다' 를 통해서, 그리고 이곳 카페의 글들을 통해서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이 있다. 사실. 사실. 사실... 그들만이 '무진보'라는 말과 같은 뜻의 '정신적, 육체적'으로 크나큰 이익을 얻는 사람들이다. 그들에 대해서 상근기라고 하며, 이런 말의 뜻 조차 이해 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 하근기, 중근기라고 한다. 

 

 

그 이익의 첫째는 '자신의 마음을 이해 하므로써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이며, 둘째는 방편으로 제조된 '도가의 약식'으로써 불치병, 난치병을 치료하는 것이다. 물질문명, 과학이나 의학, 의술 등의 의료기술로써는 수많은 질병들이 있지만 사실 100% 치료 될수 있는 질병은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은... 그 일념깊이의 정도에 따라서, 육체(몸)가 '생각의 환상물질'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하기에 다다른다. 사실 '일체유심조의 더 깊은 뜻'에 대한 설명과 같은 뜻이지만, 일념을 깨닫지 못한다면 여전히 우이독경이라는 말과 같이 쓸모 없는 소리로 들을 수밖에 없다.  

 

최 첨단 장비를 보유한 현대의학으로써는 치료가 불가능한 현대인의 모든 질병들이 '도가의 약식'으로써 100% 치료되는 이유에 대해서 이해조차 불가능한 사건이다. 세상에서는 전에 없었던 매우 희귀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이곳의 글들에 대해서 이해가 깊어진 인물들에게는 신비스러운 일도 아니며, 희귀한 사건도 아니며...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며, 특별할 것도 없는 보편타당한 앎일 뿐이다. 그것이 경험자와 말로만 듣고 반신반의하는 피경험자와의 차이이다.

 

일념이라는 말을 수천수만번 듣거나 보더라도.. 일념을 이해 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이다. '도가의 약식'으로써 불치명이나 난치병이 치료된 사람들만이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것이며, 일념을 앎으로써 그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며, 나무나도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이런 말들 또한 하근기는 비웃거나, 큰소리로 웃어버릴 수밖에 없으며, 중근기는 끊임없이 반신반의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모르는 바 아니다. 사실 불치병이나 난치병이 단지 '도가의 약식'만으로써 완치될 수 있다는 말... 절대로 믿을 수 없는 사기행각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을 것이며, 그런 사실 또한 모르는 바 아니다. 현 세상이 그렇기 때문이다. 현 세상.. 서로가 속고 속이며, 오직 돈을 벌기 위해서는 남들이 죽거나 말거나 상관 없는 중생들의 삶, 개구리보다 더 미천한 중생들과 다르지 않은 것들이 현시대의 지성체들이며, 지성체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지성체=중생이다.     

 

 

하근기들은 이런 말들 또한 크게 웃거나, 시시비비를 가리거나, 욕설을 퍼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대가 하근기라면, 하근기라고 하기 때문에 화가 난다면... 분노를 터뜨리기 전에 단 하나만이라도 깊이 생각해 보므로써 스스로 무지하다는 사실에 대해서 깨닫게 될 것이다. 

 

자. 잠시만 골똘히 생각히 보라. 

아주 아주 단순한 사건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에는 육하원칙이라는 분명한 원칙이 있다. 

지금 이 글들에 대해서 시시비비를 가리기 전에... 그대의 모든 말들로써의 주장은 '내가 있다'는 앎과 '내가 사람이다'는 '앎' 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내가 안다'는 알음일이를 주장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식이든 무엇이든.  

 

그렇다면, 그대의 '내가 있다, 내가 사람이다'는 앎은 육하원칙에 대입해 볼때, 어떤 경로에 의해서 '내가 사람이다'고 알게 되었는지 스스로 생각해 보라는 뜻이다. '남들이 그러니, 나도 그렇다'고 주장한다면... 가장 낮은 단계의 하근기 중생이다.

왜냐하면 남들이 두려워 하니, 나도 두려워 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이며, 남들이 자살하니, 니도 자살하겠다는 어러석음과 같은 무한한 어리석음이며, 남들이 불치병에 걸리기 때문에 나도 결린다는 무한한 어리석음이기 때문이며, 남들이 의술을 믿으니 나도 믿는다는 무한한 어리석음이기 때문이며, 남들이 안된다고 하니, 나도 안된다고 생각하는 무한한 어리석음이며, 남들이 비난하니 나도 비난해야 한다는 무한한 어리석음이며, 남들이 믿지 못하니, 나도 믿지 못한다는 무한한 어리석음이며, 남들이 우상을 숭배하니, 나도 해야 한다는 무한한 어리석음이며, 남들, 남들, 남들의 말에 이끌려 다니기 때문에 우주보다 더 무한한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올바른 앎, 참된 이치, 진리, 진실된 이해란... 그렇게 남들의 말에 이끌려 다니지 않는 앎을 이르는 말이다. 죽는 날까지 자기를 주장하면서... 남들의 말에 이끌려 다니기 때문에 중생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대의 모든 주장은 이와 같이 '남들의 말들 듣고' 남들의 말을 주장하는 것이다. 사실 그대의 주장은 그대의 앎이 아니라, 남들의 말을 듣고 그 말을 대신 해서 주장하면서... 자신의 앎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의 말은 모두가 남들로부터 들어서 아는 말들이며, 앵무새와 같은 것이지만, 앵무새보다 더 뛰어날 것이 없는 까닭은... 자신의 사고방식으로 들었던 말들을 다시 꾸며서 자기것인냥 주장한다는 것이다. 사실적인 것들이 아니라 남들로부터 들어서 아는 것들일 뿐이니. 가치 있는 앎이 단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하근기들의 주장들... 

'내가 사람이다'라고 주장하지만, 그 역시 육하원칙으로 따져 보더라도, '내가 사람이다'라는 말, 그 자체가 근거 없는 말, 말, 말 뿐이다. 

 

그대는 '내가 사람이다'고 주장한다.

그런 그대의 주장에는 어떤 근거가 있는가?

그대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내가 사람이다'고 알게 된 것인지 정리해 보라.

 

언제, 어디서, 어덯게 -내가 사람이다-고 알게 된 것인가?

그대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내가 있다'고 알게 된 것인가?

 

그렇다. 결론은. 누군가로부터, 타인들로부터 말, 말, 말, 말을 듣고 배워서 알게된 것들 중에서 가장 첫번째 알게된 지식이 '내가 있다'는 앎이며, 두번째가 '내가 사람이다' 라는 앎이다. 그 다음이 그대의 잡다한 지식들이다. '내가 남다라거나 여자라거나'... '나는 이런 사람이다'고 주장하는 지식들이다. 

 

그대의 지식은 그대의 지식이 아니라, 남들의 말, 말, 말들을 끌어모아서 제멋대로 각색하고 요리저리 짜깁기 하여... 그것들을 종함하여 '나는 이런 사람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아니 그러한가? 

그렇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는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가? 

 

그대는 '내가 사람이다'라고 알고 있다. 남들로부터 그렇게 들었기 때문에 아는 것이다. 타인들로부터 그렇게 듣고 배우지 않았다면... '내가 사람이다, 내가 있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말이다.

 

'내가 사람이다'는 말과 '내가 사람이 아니다'는 말은 사실 말은 다르지만, 한생각의 차이이다. '내가 사람이라고 주장하든, 내가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하든... 주장하는 사람의 생각의 차이일 수도 있다는 방식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는 뜻이다.

 

허긴. 내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정신병자들도 있는 세상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만은.

올바른 앎일 때, 그때 비로소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그 길을 알리는 것이다.

 

이런 말들, 이곳의 모든 말들... 타인들로부터 끌어모은 지식 따위로써 이해 한다고 생각한다면, 오해 하는 것이다. 이해 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착각이라고 이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이다.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만이 사실적으로 이해 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대의 '내가 있다'는 앎, '내 마음이 있다는 앎', '내 느낌이 있다는 앎', '내가 감정이 있다'는 말, 말, 말들... 사실무근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다만 지적으로나마 이해라도 할 수 있을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 평화로 가는 길에 들어선 것이다. 대도무문, 신비의 문을 볼 수 있는 지혜를 얻는 것이다. 

 

그대와 인류에게 평화 있기를... 

 

일념명상의 집 '도가' 에서 ---> http://blog.daum.net/powwr116/?t__nil_login=mybl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