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념처경이라는 경은 아마도 수행과 관련된 석가모니의 가르침인 것 같다.
사실 불경은 석가모니의 말의 뜻이 그대로 전해진 것이 아니라, 우이독경이라는 말과 같이 붓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중생들에 의해 전해진 것으로써 우상숭배사상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는 말들이다.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단 한구절도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에 우상숭배사상으로 전락된 것이다.
차라리 석가모니의 말이 인간의 말소리를 흉내내는 앵무새들에 의해서 전해졌더라면 조금은 더 석가모니의 말의 뜻이 분명하게 전해졌을지도 모르겠지만.... 중생들의 견해로써 전해지다 보니. 말만 무성할 뿐, 요점이 없으며, 그 길. 수행법 마져도 오리무중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도무문'이라는 말이 창조된 것이겠지만...
아마도 고타마의 수행에 대한 말의 첫구절에는 '이 법은 유일한 법이다'는 방식으로 시작된 것 같다.
사실 불경의 내용들 전체를. 노자의 도덕경에 대한 해석과 같은 방식으로 해석하려다가 이런 방식으로 요약하는 까닭은. 그 당시의 고타마의 말이 한자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이미 왜곡된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중생들의 견해로써, 우상숭배사상에 중점을 두다 보니. 고타마 붓다의 그 깊고 깊은 뜻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고타마가 위빠사나로 깨달았다는 방식으로써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 버린 것 같다. 세상에서 가장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부처가 위빠사나로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이다.
그것은 붓다의 주장이 아니라, 무식하고 어리석은 중생들의 자기 주장이다.
중요한 것은 고타마가 '나는 위빠사나로 깨달았다'고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며, 다만 그의 깨달음에 대한 증거하는 말이 '별은 별이 아니다'는 말로써 명색의 동일시에 대한 착각에서 깨어났음을 표현하는 말이다. 물론 인간의 지식에 바탕을 둔 관념으로써는 '명색'이라는 말의 뜻 조차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에 혼란스럽기만 할 뿐, 해답은 없는 것이며, 수행법 조차도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는 자들만 난무할 뿐, 올바른 수행자는 찾아볼 수 없는 시대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세시대라고 하는 것이다.
명색이 수행자란 그런 말재간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감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찾기 위해서 공부하는 사람을 일컷는 말이다. 머리깎은 중생들과 맹신자들에 의해서 더욱 더 그 길은 유명무실해져 대도무문이 되어벼겼기에 그 길(진리의 길. 새생명의 길)의 요점에 대해서 다시 설명하려는 것이다.
무수히도 많은 경전의 내용들 중에서 '대념처경'이라는 경이 수행론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알음알이상은 아상, 인상, 중생상을 넘어서 서로가 제가 잘났다는 자아상만 키워놓는 꼴이 되어버린 것이 옛이야기들인 경전이다. 물론 경전이라는 말 자체가 전설의 고향과 같이 지나간 말들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그것을 사실적으로 여기기 때문에 고타마의 수행에 대한 가르침에 대해서 요약하려는 것이다.
복잡한 것도 아니며, 다양할 것도 없이... 단순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진리가 단순한 것과 같이.
이런 글들 또한 일념을 깨달은 인물들에게는 보편타당한 앎이며, 상식적인 지식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말속에서 다른 말들을 찾아 헤매는 중생들에게는 평생을 찾아 다닌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소귀에 경을 읽는다는 말의 뜻과 같이 우이독경이 아닐 수 없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소위 명색이 승려라는 머리깎은 중생들을 비롯하여, 학자라는 자들 까지도 수행법. 즉 마음 찾는 방법에 대해서 서로가 옳다는 주장만 할 뿐, 일념을 깨친 자는 찾아볼 수 없으니. 석가모니를 모독하는 자들의 소행이며, 붓다들이 본다면 웃어버릴 수밖에 없는 헤프닝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 하는 짓들이 세살박이 아이들의 소꿉장난이나 인형놀이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며, 말재간들 또한 아이들의 말장난과 같은 것들보다 더 뛰어날 것이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소꿉장난이나 인형놀이에 비유하는 까닭은.
물로 세례를 준다며 성수를 뿌린다는 행위들이 그러하기 때문이며, 불상을 목용시킨다는 행위들이나, 물고기나 거북이를 잡아서 다시 방생하는 짓들, 그리고 수많은 인형들을 모아 놓고... 그 앞에 제삿상을 차리고.... 촛불에 향까지 피워 놓고... 머리깎은 중생은 단상 위에 앉아서 석가모니의 형상을 흉내 내고, 머리를 기른 중생들은 그 중생들 앞에서 절을 하고... 이게 웬 난리인가? 흥부가 기가막힐 일이 아니라, 붓다가 기가 막힐 일이다.
아무리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하더라도... 어찌 우주를 여행하는 현시대까지도 어찌 그런 어처구니 없는 짓들이 지속되는 것일까?
예수가. 달마가. 석가모니가... 다른 붓다들이, 일념을 깨친 인물들이 함께 웃는다.
허헛 참. 기가막힐 일이구나 하며, 껄껄껄 웃는다.
사실 중생들이 중요하게 여긴다는 불경들은 가치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간략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불경들의 요점인 '사구게'에 대해서만 설명했다. 사구게만 보더라도 그 한구절에 모든 내용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법귀일하처라는 말과 같이 모든 법이 하나로 통하는 것이며, 그 하나가 모든 것이기 때문이며, 궁극에는 '본무. 본래무일물'이기 때문이다
대념처경이라는 내용들이 수행의 길이라면, 그 방법은 단순한 것이다.
왜냐하면, 고타마의 모든 말들의 결론은 수행론이며, 마음으로부터 해탈하는 방법이다.
그 방법이 '무상한 것은 나가 아니다, 수상행식도 이와 같다, 그것을 관찰하라'는 말이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무상한 것'이라는 말은 '몸, 육체'를 일컷는 말이다. 일체유심조의 더 깊은 뜻에서 설명된 바와 같이 '일체'를 일컷는 말이며, 깨달음이라는 것은 일념의 무념처에서 '육체가 나가 아님'을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무상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며. (무아가 아니라, 무아상이라고 하였으니 오해 없기를... 본무이니... )
'수상행식'도 이와 같다는 말은 '얻을 수' 자와 '생각할 상' 자와 '다닐 행' 자와 '앎 식' 자로써 마음을 일컷는 말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이런 말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없는 중생들의 견해에 의해서 창조된 말들이 '사념처' 라는 말이며, '팔정도' 라는 말이다. 더 나아가 '고집멸도'라는 말에 대해서 까지도 '고성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 라는 말로써 또 어지럽게 말만 만드는 것들이기 때문에 하근기 중생이라고 하는 것이다.
'수상행식'이라는 말은 단지 '마음'을 일컷는 말이며, 마음이 생겨나는 과정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서 '수상행식'이라는 말로 풀어 놓은 것이다. 이는 어린아이가 말을 배워서 말을 익히는 과정이다. 이는 또한 '무명, 행, 식, 명색... 으로 이어지는 12연기법의 설명과도 같은 뜻이다.
무명의 행위는 '말을 배우기 이전의 어린아이의 행위를 일컷는 말이며, 강아지와 같이 무명의 행을 통해서 아이들이 타인들로부터 말을 듣고 배우고 익힘으로써 앎(식)이 생겨나는 것이며, 그 앎이 곧 명색으로써의 분별이라는 뜻이다. '별은 별이 아니다'는 말과 같이, '사과는 사과가 아니다'는 말과 같이. 그것과 그것의 이름과는 별개라는 뜻이지만, 이런 말들 또한 일념을 깨닫고 나야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니... 어차피 우이독경이기는 매 한가지이다.
'수상행식'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없는 중생들이 또다시 '수념처, 상념처, 행념처, 식념처' 라는 방식으로 말을 창조해 내는 것 같다. 그 말이 '신념처, 수념처, 심념처, 법념처' 등으로 왜곡되면서 또 다시 다른 말들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기 때문에, 그런 자들, 불경을 연구한다는 자들에 대해서 가장 무식하고 어리석은 중생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이독경이라는 말에서의 '소' 보다 더 낮은 단계의 중생들이다. 차라리 소라면, 그렇게 왜곡시켜가면서 제 잘난체는 하지 않을 터이니.
붓다의 견해로써 본다면 붓다의 말을 왜곡시키는 인간중생들은 소나 말, 돼지보다도 더 뛰어날 것이 없는 무리들인 것이다. 차라리 앵무새의 지저귐이 훨씬 더 낫다고 하는 까닭이다.
'수상행식'도 이와 같다는 말은 '육체는 나가 아니며, 마음 또한 나가 아니다, 그러니 그것을 관찰하라는 뜻이다. 그것을 관찰하라는 뜻은, 마음을 관찰하라는 말도 아니며, 육체의 행위를 관찰하라는 말도 아니다. 중생들의 무한한 어리석음에 의헤서 '위빠사나'라는 방법으로써 육체의 행위를 관찰하는 방법이 창조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근기 중생이라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근기 중생들은 '관찰하라'고 하는 말에 집착하여 생각하게 되었는데.
'마음을 관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므로, 육체를 관찰하라는 말인가보다' 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근기 중생이라고 하는 것이다. 석가모니의 말이라면, 붓다의 말이라면, 관찰하라는 말은 생각하라는 말이다. 한자로서는 '한글로 생각하라'는 말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다. 그렇다 보니 그져 '관' 또는 '관하라' 는 방식으로 전해진 것이며,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알음알이로써 흔히 하는 말이 '관하라'는 말이다.
어리석은 중생들의 법거량이거나 선문답이라는 말재간들에서 흔히 나오는 말이 이 '관(觀)' 이라는 글자이다. 무엇을 어떻게 관하라는 뜻인지도 모른다. 아는 것이 없다보니. 그져 '관하라' 라고 주장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큰소리로 '관' 이라는 말로써 말재간을 부리는데, 남진제라는 중생의 법거량에서도 나오는 말이다. 그런 자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관하는 것인가? 라고 물어보라. 아니면 그 주둥이를 꿰매라고 하든지.
대념처경의 요지는 간단하고 명료하다.
진리는 단순하다는 말과 같다.
무상한 것은 나가 아니다, 마음 또한 나가 아니다, 그것을 관찰하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상한몸을 나라고 생각하는 나는 누구인가, 무상한 마음을 나라고 생각하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방법으로써 '나는 누구인가'를 물어 들어가라는 뜻이다.
위에서의 '무상'이라는 말은 '없을 무' 자와 '항상 상' 자로써 '항상할 수 없는 것, 끊임없이 변해 가는 것' 또는 영원할 수 없는 것' 이라는 뜻이다. 그 끊임없이 변해가는 것, 그것은 나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타마는 '몸은 나도 아니며, 내것도 아니며, 나와 비슷한 것도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나는 용도 아니며, 신도 아니며, 더 나아가 나는 사람도 아니다'는 말 또한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그대는. 아니 인간은 누구나 어린아이시절을 기억할 수 없으나, 그 시절에 대한 설명으로써 이해는 가능할 수 있다. 말을 배우기 이전의 어린아이들에게는 '나와 너' 라는 분별심이 없으며, 그대 또한 어린아이서절에는 '나는 여자다' 라거나 또는 '나는 남자다'라는 분별심이 없었던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나와 너 그리고 다른 것이라는 분별이 없었기 때문에 그 아이들에 대해서 순수의식에 가깝다는 말로 표현된 것이다.
순수의식의 어린아이 상태가 '무명'이며, 말을 배우고 익혀서 아는 앎이 지식이 아니라 '무지'라고 말하는 까닭이다. 무지를 벗어나 올바른 앎에 대해서 광명의 빛이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며, 전지전능이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며, 능한 것이 없으되 능하지 못한 것이 없다'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다. 광명의 지혜, 전식자. '이를 지' 자의 지인, 도인, '이룰 성 자의 '성인' 등으로 표현되는 모든 말들... 도를 깨달아 아는 인물들을 지칭하는 말이며, 그와 같은 뜻의 다른 말들이 '참나, 진아' 등이다. '부처'라는 말, '붓다'라는 말 또한 '올바른 앎을 말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하지만 명심하라.
명색이 부처일 뿐, 그것은 형상이나 소리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부처를 갈망하는 어리석음에 벗어나라는 말이며, 오직 자신의 마음의 정체를 찾아야만 비로소 삶과 죽음을 초월한 진정한 나로써 가치 있는 삶, 검증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인간들의 삶 자체가 아귀다툼이며, 아귀지옥이다. 서로가 잘났다고 싸움질을 일삼는 삶, 서로가 옳다며 자기를 주장해야만 하는 삶, 서로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죽는 날까지 투쟁을 일삼아야만 하는 삶, 삶, 삶들... 어찌 짐승보다 더 뛰어난 삶일 수 있겠는가말이다. 더 나아가 인간이 인간을 반려자로 삼기 보다는 동물들을 반려자로 삼는 일들... 어찌 인간세상이 그토록 타락했단 말인가? 그렇기 때문에 예수 말하기를... 하늘에서 보니 부패하고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라고 한 것이다.
그대는 육체가 나며, 마음이 나며, 생각이 나며, 느낌이 나라고 생각하는가?
그대가 나라고 아는 것들... 그것들은 언제 어디서 누구로부터 들어서 아는 것인가?
그대가 '나'라고 주장하는 것들은 겨우, 지난 날들에 대한 기억속의 생각들에 대해서 '나'라고 주장하는 것이며, 그 기억속의 느낌을 주장하는 것이며, 기억할 수 있는 과거와, 기억하고 싶은 과거에 대해서만 주장하는 것이다.
과거에 남들로부터 듣거나 보고 배운 것들이다.
그렇지 않은가?
사실 그대의 모든 주장, 아니 인간들의 모든 주장에는 진실된 말이란 한 하나도 없다. 아니. 사실 인간들의 모든 주장들은 모두, 모두, 모두가 거짓된 말들이다. 올바른 앎이란 단 하나도 없다. 그대가 일념을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대는 거짓말쟁이며, 올바른 앎은 단 하나도 없으면서 잘난체만 하는 무지한 사람이다. 무지한자가 무지한줄도 모르기 때문에 우주보다 더 무한한 어리석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석가모를. 진리를. 깨달음을. 마음을 찾기 위한 수행방법들까지도 상품화된 세상이기 때문에 말세시대라고 하는 것이다.
그대여. 인연있는 자여.
그대가 구도자, 수도자라면, 마음을 찾아서 진정 가치 있는 삶, 검증된 삶을 원하는 자라면, 머리깎은 하근기 중생이 되거나, 그 수하들로써 법을 구하려 하지 말라. 왜냐하면 금강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이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그대가 '도'를 구하는 자라면, 보리달마의 말에 귀 기울여라.
'관신자 맹신자는 성현이 말에서 멀어져갈 뿐이다' 라고 했던 인물이 '달마'이기 때문이며, 그나마 인간세상에 나도는 말들 중에서는 '보리달마'의 경전에 대한 견해만이 올바른 견해이기 때문이다.
다만 금강경의 사구게에 기록된 글귀들 중에서 단 한구절만이라도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있는 자라면, 석가모니를 우상으로 숭배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약 삼천여년 전에 존재했던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의 요지는 단 한구절이다.
'무상한 것은 나가 아니다, 마음도 이와 같다, 그것을 관찰하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 말과 같은 뜻에 대해서 현시대의 가장 보편적인 언어로써 표현된 말이 이곳에 설명되는 '일념법, 일념명상법'이다.
일념법. 일념명상법. 일념윤회법이 진리이다.
그대의 마음의 실체를 깨닫기 위한 유일한 방법, 법이기 때문이다.
가치 있는 삶, 검증된 삶을 살기 위한 유일한 인생의 길에 대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대와 인류에게 평화 있기를...
일념명상의 집 '도가' ---> http://blog.daum.net/powwr116/?t__nil_login=my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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