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경은 석가모니의 말이 아니라, 석가모니의 말이 왜곡된 전설이며, 신화... 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관념으로써 '깨달음을 얻은자'의 말은 결코 단 한구절도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래의 내용은 발췌한 글이다.
[최효찬의 ‘서울대 권장도서 100선 읽기’](8) 아함경 ➊ | 왜 싯다르타는 자신을 ‘붓다(깨달음을 얻은 자)’라고 불렀나
기사입력 2013.10.07 09:30:21
아함경은 붓다가 깨달음을 얻고 45년 동안 설법을 하다 입적한 이후 제자들이 100년 동안 붓다의 언행을 재현해 초기 불교의 모습을 담은 경전이다. 마스터니 후미오의 ‘아함경(현암사)’으로 개괄한 후에 성열 편역의 ‘부처님 말씀(현암사)’을 함께 보면 방대한 아함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 “중생의 길고 긴 역사를 관찰해보니 이 세상 모든 존재들이 직면하는 고뇌는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음을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객관 대상에 대한 집착과 내면적으로 망상에 매달리는 것에서 벗어나 독화살과 같은 번뇌를 없애버렸으니 생과 사의 문제에서 초래되는 갈등에서 자유를 얻었다.”
아함경에 나오는 이 말은 고타마 싯다르타(BC 563~ 483년)가 자신을 왜 ‘붓다(깨달음을 얻은 자)’라고 칭하는지를 한 바라문(브라만교)에게 설명해주는 구절이다.
아함경은 고타마가 35살에 깨달음을 얻은 후 80세에 입적하기까지 붓다와 그 제자들이 행한 초기 불교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붓다의 가르침이 사라질 것을 걱정한 500명의 제자들이 100년 동안에 걸쳐 붓다의 가르침을 결집해 만든 경전이 바로 아함경이다. 아함경은 한 사람이 붓다의 말씀을 기억해내고 그 기억해낸 것을 함께 외워 공인하는 형식으로 결집됐는데 장아함경, 중아함경, 잡아함경, 증일아함경 등으로 구성된다. 아함(阿含)은 ‘아가마’의 한역인데 ‘전해 온 것’이라는 뜻이다.
29살에 출가한 붓다는 알라라 칼라마와 우다카 라마푸타라는 두 스승에게 잠시 가르침을 받다 ‘고행 수행법’으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스승 곁을 떠났다. 6년 동안 고행에 정진했지만 몸만 극도로 쇠약해지고 정신마저 몽롱해질 뿐, 아무런 깨달음도 얻을 수 없었다. 여기서 붓다는 중대 결단을 내린다. 고행 수행법이 최상의 방법이 아니라며 이를 떨쳐버린 것이다. 고행으로는 결코 선정에 이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자 7일 만에 깨달음이 불현듯 찾아왔다. 삶은 고해이지만 나와 연결된 ‘집착’을 버림으로써 고해에서 벗어나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붓다가 당시 수행법이었던 고행주의를 과감하게 포기한 것이다. 고행이란 육체를 약화시킴으로써 정신의 힘을 높일 수 있다는 사고방식에서 나온 수행법이다. 고행에 신비한 힘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던 고대 인도사회에서 그 불합리성을 확인하고 그로부터 탈출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이는 기존 관념을 깨부수는 혁신적인 것이었다. 그가 고행을 중지하자 함께 수행하던 다섯 사문(전통적인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수행자로 후에는 불교 수행자를 의미)들이 붓다를 비난하고 그를 떠난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붓다는 고행을 포기한 이유에 대해 “이를테면 물속에 잠겨 있는 젖은 나무를 보고, 좋은 찬목(마찰해 불을 일으키는 나무)을 갖고 와서 ‘내가 불을 일으키리라. 빛을 내게 하리라’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한다. 젖은 나무는 아무리 마찰시켜도 불이 생겨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고행을 해봤자 고행으로는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과감한 포기가 오히려 큰 깨달음을 안겨줬다. 그의 출가가 왕족이라는 기득권의 ‘크나큰 포기’인 것처럼 이번에는 고행 수행을 포기함으로써 마침내 정각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포기할 줄 알아야 큰 것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2) 해탈을 얻은 붓다는 자신의 심심미묘한 깨달음을 혼자만 간직할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지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자신의 깨달음을 이해해주지 못할까 대중 설법을 지레 회의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붓다는 고민을 떨치고 자신의 깨달음에 대해 공개적인 설법을 펴기로 또 한 번 중대결심을 한다. 붓다는 당시 바라문 사제들이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을 비밀리에 전수한 것처럼, 자신 또한 자신의 깨달음을 공개적으로 설법하기를 포기했을 수도 있었다. 붓다의 공개 설법 역시 당시 관행으로서는 획기적인 시도이자 도전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깨달음을 설법하기로 결심했지만 이번에는 과연 누구에게 이 법(진리)을 설할 것이냐의 문제에 부딪친다. 붓다는 첫 설법 상대로 옛 스승을 떠올렸다. 스승이라면 심심미묘한 이치를 이해해 주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수소문한 결과 두 스승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붓다는 생각 끝에 옛 친구들을 설법의 대상으로 선택했다. 붓다가 고행을 포기하는 것을 보고는 붓다를 경멸하면서 떠난 다섯 사문들이었다. 붓다는 첫 설법을 위해 말하자면 ‘까다롭고 벅찬’ 상대를 고른 것이다. 붓다가 무려 250㎞를 걸어 녹야원에 도착했지만 다섯 명의 비구들은 붓다를 보고도 아무도 반가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고행을 버리고 사치에 떨어진 사람’이라며 붓다를 경멸의 눈으로 대했다.
(3) “출가한 이는 두 극단을 달려가서는 안 되나니, 온갖 욕망에 깊이 집착하지 말고 고행을 일삼지 마라. 나는 두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깨달았으니 그것은 눈을 뜨게 하고 지혜를 생기게 한다.”
붓다의 첫 설법은 두 극단적인 입장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된다. 그 하나는 쾌락주의의 입장, 즉 온갖 욕망에 깊이 집착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또 하나는 금욕주의의 입장, 즉 스스로 고행을 일삼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두 극단적인 입장에 대한 비판은 바로 그 자신의 과거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기도 했다. 붓다는 겸손하고 열정적인 자세로 깨달음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했다.
첫 설법에서 붓다는 네 가지 진리를 들려줬는데 이게 바로 오늘날 불교에서 말하는 ‘사성제(四聖諦)’다. 사성제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는 말로, 붓다의 인생관이 집약된 것이다.
먼저 인생의 현실은 괴로움(苦)으로 충만해 있다. 미운 사람을 만남도,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함도, 갖고 싶은 것을 얻지 못함도 ‘고’라고 했다. 한마디로 이 인생의 양상은 ‘고’ 아닌 것이 없다. 이런 괴로움의 원인은 번뇌 때문이다. 번뇌를 없애면 괴로움이 없는 열반의 세계에 이르게 된다.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팔정도(八正道)를 실천해야 된다. 팔정도는 바른 견해(正見), 바른 생각(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활(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신념(正念), 바른 명상(正定) 등이다.
이로써 붓다가 처음으로 행한 설법의 프레젠테이션이 끝났다. 붓다의 설법은 자신의 주장이나 신념을 설파한 최초의 프레젠테이션이 아니었을까. 이 설법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부른다.
첫 설법을 하고 며칠이 지나자 다섯 비구 중 한 사람인 콘단냐가 최초로 붓다의 사상체계인 사성제와 팔정도를 이해하게 됐다. 이에 붓다는 “콘단냐는 먼저 티 없는 청정한 법안(法眼)을 떴다”면서 “콘단냐는 깨달았다”고 말했다. 첫 제자의 탄생이었다. 이어 나머지 네 명도 붓다의 설법을 이해하게 됐고 이렇게 그를 비난했던 다섯 명의 비구들은 모두 붓다의 첫 제자가 됐다. 붓다는 제자들이 60명으로 불어나자 전도를 위해 세상으로 제자들을 떠나보낸다.
(4) 붓다는 전도를 떠나는 제자들에게 수계, 즉 출가를 허가하는 권한을 줬다. 이는 파격적인 권한 이양이었다. 제자들은 붓다를 대신해 붓다의 마케터가 돼 그의 사상을 널리 전파했다. ‘리더의 유일한 정의는 추종자를 두는 것’이라는 피터 드러커의 말처럼 붓다가 깨달음을 얻고 진리를 전파하기 위한 과정은 리더십 측면에서 훌륭한 사례가 되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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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불경은 석가모니의 진리에 바탕을 둔 가르침이라고 주장하지만, 석가모니의 본질과는 상관 없는 전설, 신화... 로써 석가모니를 우상으로 숭배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잡서이다. 왜냐하면... 석가모니의 본질에 대한 가르침이라면... '종교' 라는 '우상숭배'를 위한 목적의 집단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아함경'이라는 경전이 석가모니의 깨달음 이후 최초로 전해진 말인 것 같다. 그런데 석가모니의 진언이 아니라, 100여년에 걸쳐서 기억력이 뛰어난 사람들의 말들로써 기록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석가모니의 말을 들었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석가모니의 말의 뜻을 전할 수 없다. 설령 그 당시에 녹음기라는 기계가 있어서 녹음을 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지식으로서는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말이 그들, 소위 맹색이 깨달은 자들의 말이기 때문이다.
사실, 현시대까지도 석가모니의 말과 예수의 말에 대해서 단 한구절도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말이 이분법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들의, 언술이 뛰어난 지식에 의해서 서로가 옳다는 방식의 수많은... 종교들과 명상 집단들이 창궐하게 된 것이다. 사실. 그들의 진언들, 진실된 말, 진리에 대해서 단 한구절만이라도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있다면... 우상숭배사상 따위로 전락될 수 없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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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1) 의... 중생의 길고 긴 역사를 관찰해 보니.... 라는 말은. 인간들의 역사와 같이 또는 개개인 인간들의 삶과 같이...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어야 하기 때문에 고통이며, 삶 또한 기쁨이나 즐거움을 행복, 평화.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으로써의 고통이 아닐 수 없다는 말이, 스스로 깨달아 보니... 언어 자체가 상대적인 것으로써 사실적이 아닌 것이며, 모든 고통과 괴로움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내면에서 스스로 일어나는 생각들... 즉 모든 고통은...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인 지식)에 바탕을 둔 사념(망상)이 원인이다는 사실에 대해서 깨달아 앎으로써의 지혜가 생긴다는 말이다.
위 (2) '해탈을 얻은 붓다' 라는 말은 사실, '마음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깨달아 아는 앎을 이르는 말이다. 이에 대해서 '심해탈'이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며... 한글로 표현한다면 '마음을 이해하여 마음으로부터 탈출한다'는 뜻으로 표현될 수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상대적인 언어로써 표현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즉도, 중도, 깨달음' 지헤'를 얻은 사람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깨달음'이 있다, 깨달음이 없다는 말 또한 분별이 아닐 수 없기 때문에... '본래무일물'이라는 말로써 '깨달음' 이라는 말 또한 '시명중도' 라는 방식으로써 그것 또한 바르게 아는 앎, 즉 진리의 앎이라면 '이름'이다, 라는 뜻이다. 그러니... 깨달음이 있다, 없다는 말 또한 올바른 앎이 아닌 것이다.
--- 여기서 중요한 말은... 과연 이런 '진리'를 혼자만 간직할지, 또는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지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사유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가령 사람들은 '내가 있다, 내가 사람이다, 내마음이 있다, 내가 생각할 수 있다'는 지식의 앎에 대해서 하나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모든 앎(識, 언어)들이 '원리전도몽상'으로써의 착각이다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알려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고뇌아닌 고뇌 즉 깊은 사유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깊이 고뇌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굳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오직 진리를 전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 일을 시작하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결국 진정한 자유, 평화, 행복한 삶이기 때문이다. 지식을 초월한 진리의 앎은... 삶과 죽음 등의 인간 삶의 모든 고통을 소멸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며, 인간 삶이 있다면... 인간이 가야만 할 유일한 길이 곧 진리의 길이기 때문이며, 삶의 유일한 목적이 자아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인간 내면, 즉 잠재의식에 간직된 열망은 오직 그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이 인간으로써 진리를 모른다면... 살아가야할 이유가 없는 것이며, 존재의 가치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3) 출가한 이는 두 극단을 달려나가서는 아니된다는 말은... 언어가 상대적인 말로써 이루어진 것이라는 말이며, 상대적인 것은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 와 '너' 라는 말이 상대적인 말로써 전자가 사라진다면 후자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며, 후자가 사라지는 일 또한 그러하다. '나' 가 있기 때문에... 마음, 느낌, 생각, 감정... 등의 대상이 있는 것이며, 그 대상들에 의해서 다른 사람들, 인간세상, 자연, 우주, 하늘... 등의 대상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 가 없다면... 대상 또한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고통의 원인이 곧 '나 아닌 것'에 대해서 '나' 라고 아는 앎(지식, 언어)이 원인이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의 실체를 깨달아 알때, 곧 나와 너, 나와 세상, 나와 우주... 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무위자연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이며, 또한 삶과 죽음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시명 중도, 시명불성' 이라는 한자로 번역된 것이며, 한글로 표기한다면... '이름' 으로써만 있는 것' 이라는 뜻이다. 더 나아가 '본래무일물' 이라는 말로써... 언어 조차도 본래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인간이 없다면, 언어가 없는 것이며, 또한 언어가 없다면, 인간이라는 말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첫 설법의 '사성제와 팔정도' 가 진리... 라는 말 또한 중생들의 언술에서 비롯된 양극단에 대한 주장이다. '진리'란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육하원칙에 준하여, 근거가 분명한 앎이라야 하기 때문이다. 무조건 '사성제'인 '고집멸도'가 진리라는 주장은 하근기 중생들의 견해이다. 인간의 관념, 지식으로써는 '진리' 라는 말,, 말, 말만 아는 것일 뿐, '진리'에 대해서는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상대적인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 '실체' 이며, 진리이기 때문이다. 굳이 진리라고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다면... '무고집멸도' 라는 말로써... 본래 '고통이 없기 때문에 고통을 소멸하는 방법 또한 본래 없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이 온전하게 이해 할 수 있는 진리란... 진리를 알기 위한 방법, 즉 '일념법, 일념명상법'이라는 법, 방법, 길에 대해서 이해 하는 것이다.
(4) 붓다는 전도를 떠나는 제자들에게 수계, 즉 출가를 허가하는 권한을 줬다. ... 는 말은 석가모니의 말이 아니다.
언술이 뛰어난 자들의 주장이다.
왜냐하면, 깨달음이란 자신이 스스로 깨달아 아는 앎으로써 누군가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그대가 '나는 사람이다' 라고 안다면... 그런 앎에 대해서 남들에게 '내가 사람입니까' 라는 방식으로 남들로부터 인가를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깨달음, 득도... 에 대해서 인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석가모니 또한 그러하다. 서가모니가 누군가로부터 인정을 받거나 인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고 나서, 인간세상에 진리를 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실수해서 깨달은 것이 아니라... 6 년여 동안의 고행과 사유를 통해서 깨닫게 된 것이다.
한 가지만 올바르게 알고 넘어가자.
석가모니의 진언 중에는 '일체중생개유불성'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모든 인간은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이며, 경험이전의 '나' 가 있다는 말이다. 물론 '나' 라는 말 또한 '이름' 이다. '명색'의 동일시로써의 '나' 가 아니라... '육체가 나다, 또는 육체가 나가 아니다' 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떠난 '나' 를 일컷는 말이다. 그 '나' 에 대해서... '불성, 성령, 그것, 道' 라는 다른 이름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것'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언어로 표현될 수 없기 때문이지만, 오직 그것이 존재계의 유일한 '실체'이기 때문이다.
일념법, 일념명상법으로써 일념이 무념처에서 깨달아 아는 최초의 앎이 '육체가 나라는 생각일 뿐... '이라는 각성이다. 이에 대한 예수이 말은... '너희가 어린아이시절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성령을 볼 수 없으며, 하늘나라를 볼 수 없는 것이다' 라고 말한 까닭이다. 예수가 존재했던 시대에는 "그것"(실체) 에 대해서 '하나남 말씀' 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 시대 인간들의 지식수준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석가모니의 '원리전도몽상'에서 깨어나라는 말, 그리고 예수의 하루종일 기도하여 깨어나라는 말... 같은 뜻의 다른 표현으로써 '육체가 나다'라는 단견, 소견, 편견에서 깨어나라는 뜻이며, (3)의 두 극단을 달려 나가서는 아니된다는 말의 뜻이다.
인간의 모든 앎(지식)은 '이것이다 또는 저것이다, 좋은 것이다 또는 나쁜 것이다, 큰 것이다 또는 작은 것이다, 깨끗한 것이다 또는 더러운 것이다, 아름다운 것이다, 또는 추한 것이다, 선한 것이다 또는 악한 것이다... 더 나아가 '마음이 있다 또는 마음이 없다' 신이 있다, 없다, 또는 하나님이 있다, 또는 없다, 영혼이 있다, 또는 없다, 귀신이 있다 또는 없다, 삶이 있다 또는 없다, 죽음이 있다 또는 없다' 등의 양 극단에 대한 서로간의 주장이 아닐 수 없기 때문에며... 그런 주장들로써는 결코 해답을 구할 수 없는 것이다. 본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인간세상이기 때문에... 진리를 깨달아야만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시대의 보편적인 언어로써 '생각이 원리'라는 말에 바탕을 두고 사실을 사실 그대로 설명하는 것이다. 다만 인간은 생각의 생멸현상에 대해서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 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에 일념법, 일념명상법이라는 방법으로써 설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그 방법만이 자신의 생각의 생멸현상에 대해서 온전하게 이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지식은 논리적일 수 없으며, 근거 없는 주장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반면에 진리는 지극히 논리적이며, 근거가 분명한 앎이기 때문에 오직 진리를 앎으로써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진리와 인연있는 이에게 영원한 자유있기를...
일념명상의 집 '도가' (진리의 길 입문) 개요 보기 ---> http://blog.daum.net/powwr116/?t__nil_login=my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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