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행복이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행복이 있는 것이다.
인간이 없다면 행복 또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사실 인간은 본래 인간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 행복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아니 본래 없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인간이라고 주장하지만, 인간이라는 근거가 없다.
그런데 인간 지식의 앎은 이런 사실에 대해서 이해 조차 불가능하다. 왜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것인지 조차 이해 할 수 없다.
지식은 인간이 무형의 실체인 영혼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알며, 죽은다음에 귀신이 된다고 알며, 심지어 사후세계가 있다고 믿는것 같다. 물론 죽음을 경험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해서 이해 조차 불가능한 무지와 무명에 바탕을 둔 지식의 무한한 어리석음에 따른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살아있는 자들은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 현실에서 꿈을 경험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며, 꿈속에서 현실을 경험할 수 없는 이치와도 다르지 않다. 또한 죽은자들은 죽음을 경험할 수 없으며, 삶을 경험할 수 없으며, 꿈을 경험할 수 없다.
사실, 산자들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거짓된 앎인 지식으로써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의심에 바탕을 둔 두려움과 공포, 근심과 걱정, 불행과 불평불만, 갈등과 다툼, 그리고 치열하고 치졸한 경쟁들 뿐이다. 그런 인간들에게 행복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고통과 괴로움에서 잠시... 벗어나는 것 뿐이다. 행복을 갈망하고 그것을 찾아다니는 까닭은 그것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본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세상의 역사를 샅샅이 뒤져보더라도... 행복한 세상은 단 한시도 없었으며, 현시대 또한 그러한 까닭이다.
만약에 인간에게 행복이 있을 수 있다면... 진리 안에서만 경험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들의 모든 학문에 바탕을 둔 지식들은 거짓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행복이라는 말 또한 거짓된 주장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본래 인간이 아닌 것, 근본이 없는 것, 근본원인물질 조차 없는 것에 대해서 '인간'이라고 아는 앎 자체가 그릇된 앎이며, 착각이다. 이와같이 지식의 모든 앎에는 올바른 앎이 단 하나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며, 완전하게 거짓된 앎이기 때문이다.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믿든 믿지 않든 중요한 일은 아니다.
다만 인간은 누구나... 자신들의 '몸과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무형의 실체가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영혼'이라고 단정짓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형의 실체에 의해서 몸과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라면, 인간은 본래 인간이 아니라, 영혼의 지배를 받는 물질이라는 뜻이거나, 또는 영혼이 깃든 물건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런 말들만으로써도 사실, 인간은 스스로 본래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는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인간은 본래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며, 인간이라고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근거가 없으며, 근본원인물질 조차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에 대해서 거짓이라고 하는 것이다. 진실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도대체 무엇일까?
사실. 그대 또한 그러하다. 다만 그런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하는 인간이라면... 진리에 대해서 이해 하는 사람이며,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이며, 행복을 경험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현시대는 지식으로써도 뛰어난 인물들은 진리를 이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식은 무턱대고 주장하는 것이지만... 진리는 지극히 논리적이기 때문이다.
몸에 깃든 무형의 실체에 의해서 몸과 마음이 움직인다고 생각한다면, 도대체 몸에 깃든 무형의 실체가 무엇일까? 몸을 해부하고 분석해 보더라도 그 실체를 찾을 수 없다. 우주를 샅샅이 뒤져보더라도 우주의 실체를 찾을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지식의 한계이다. 다만 일념법으로써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에게는 상식적인 앎이며, 보편타당한 앎으로서... 생각의 생멸현상의 작용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한다는 것이다.
사실, 그대의 마음 또한 본래 마음이 아니라 무지에 바탕을 둔 지식들 중의 일부이다. 어린아이시절부터 타인들로부터 듣고 배우고 익힌 말들에 대해서 자신의 '나' 라고 아는 것이며, 자존심이 생겨난 것이다. 마음이 언제 생겨났는지 기억할 수 없다. 다만 어린아이시절부터 타인들로부터.... 듣고 보고 배우는 과정에서 부지불식간에 생겨난 것이 '마음'이다.
그 이전에는 없었던 것이다.
사실, 인간들의 모든 지식은 의심이다. 그리고 의심은 긍정적인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것이다. 지식이 끊임없이 끝없이 더 많아지는 까닭은 의심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그런 사실, 즉 지식이 또 다른 의심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조차 이해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끝없이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지만 여전히 올바른 앎은 단 하나도 없다. 여전히 무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이 인간이라고 주장하면서 인간이 무엇인지 조차 이해 할 수 없는 것이 지식이기 때문이며, 마음이 무엇인지 이해조차 불가능한 것이 지식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행복이 무엇인지 조차 이해 할 수 없는 것이 지식이며, 평화를 경험할 수 없는 것이 지식이며, 자유를 경험할 수 없는 것이 지식으로써의 앎이다. 그런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하는 앎이 진리이며, 지식을 넘어선 진리의 앎이다.
사실, 언어로써는 상대적이 아닌 것에 대해서 표현할 수 없다.
영원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영원한 것이 없다는 말과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분별이 없다는 말 또한 분별이 있다는 말과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설사 '이것도 없으며, 저것도 없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또한 '아무것도 없는 것' 이라는 말이 남겨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본래무일물'이라는 말이 그러하다. '본래 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우주가 본래 없다고 하더라도... '없는 것'을 상상하는 '자아'가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아가 본래 자아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깨달아 아는 앎에 대해서 '득도, 중도, 불타' 등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단군신화와 같은 전설들 중에서 예수의 말이 왜곡된 성경과 석가모니의 말이 신화로 둔갑된 말들이 단군신화와는 전혀 다른 특징이 있다면, '본래무일물' 이라는 말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의 '본래무일물'이라는 말에 대한 표현은 '하나님의 창조'라는 뜻으로 번역된 것이다.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예수의 말을 오해하여 '하나님'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하늘에 하나님은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분명히 밝혔다는 것이다. 그 증거가 뭐겠는가? 그렇다. 예수는... 하나님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네 안에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네 안에 하나님이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 글을 통해서 세상에서 가장 지능이 뛰어난 인물들만이 이해 할 수 있는 중요한 사실 두가지에 대해서 설명하려한다.
그 하나는 인간이 행복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방법(秘法)이며, 둘은... 인간들의 지식이, 무턱대고 주장하는 것일 뿐, 논리적인 것이 아니며,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이해이다.
둘째부터 시작하자.
인간의 지식으로써의 앎의 오류 중에 첫째의 앎이 '육체가 나다' 라는 앎이며, 굳이 째가 있다면 우주자연이 있다는 앎이다. 사실, 위의 설명과 같이... 둘 다 근거없는 주장이다. 우주가 있는 까닭은... 그릇된 자아가 있기 때문이다. 보는자가 없다면... 우주 또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육체가 나다' 라는 앎이 없었더라면(순수의식의 어린아이들과 같이), '나와 너' 라는 분별심이 생겨날 까닭이 없다는 것이며, 육체에 대한, 생명에 대한 집착이 생겨날 까닭이 없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욕망의 노예로 전락될 까닭이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육체가 나다라는 앎은 육체가 나가 아니다라는 앎과 상대적인 앎일 뿐, 올바른 앎이 아니기 때문에 일념명상법으로써... 그런 사실에 대해서 깨달아 아는 앎으로써 진리로 거듭날 수 있다는 말이다.
사실. 인간이 자신의 삶을 통해서 행복을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오직 유상삼매의 경험뿐이다.
죽음이 목적지가 아닐 수 없는 인간에게 행복이 있다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삶이 경쟁이며, 투쟁이 아닐 수 없는 전쟁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주장들 또한 어불성설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이며, 종교들간의 전쟁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시대 인간들의 행복을 추구하는 최후의 수단과 방법이 있다면... 부를 축적하여 세계를 돌아다니는 여행인 것 같다. 이름하여 '관광'여행이다.
그런데 신비스러운 것은 '관광'이라는 낱말이다.
'觀光' 이라는 낱말의 한자의 뜻을 보니, '볼 관' 자와 '빛 광' 자로써 '빛'을 보기 위해서 돌아다닌다는 뜻이다. 사실, 관광여행이라는 말 또한 자신의 내면의 밝은 빛 즉 진리의 앎을 위한 수행방법이 왜곡되어 생겨난 말이다.
"만약에 인간에게 삶이 있다면" 그리고 그 삶에 '행복'이 있다면 유일한 방법이 일념명상법으로써의 유상삼매에서이다. 사실. 인간이 본래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에게 삶이 있다면" 이라는 말 또는 "행복이 있다면" 이라는 말 조차도 어불성설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있으며, 또한 그런 인간들에게 삶이 있다면, 그리고 행복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행복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일념명상법으로써 '사념이 모두 사라짐을 경험하게 되는 유상삼매' 뿐이라는 뜻이다.
사실. 인간의 모든 생각들이 '사념'이다.
인간세상에서 부처를 이루겠노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思念'을 물리치기 위한 수행방법들을 창조해 내는 것 같다. 하지만 모두가 사념이 아닐 수 없다. '부처'란 부처라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의 관념, 지식으로써 깨달음을 얻을 수 없는 까닭은 '언어, 말'에 집착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수행에 목적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수행의 목적이 '붓다, 불성, 성령, 깨달음, 진아, 참나, 밝은 빛, 빛, 광명의 빛, 자등명, 법등명...' 등의 말, 말, 말, 낱말들을 염두에 둔 수행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본래무일물'이라는 말의 뜻에 대해서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깨달음'이 있다면, 그것은 언어의 근원, 자아의 근원, 우주의 근원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근원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본래무일물'이라는 말, 말, 말이 없는 것이다. 오직 자신의 본래의 나를 보는 것이다. '그것'은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언어는 상대적이 아닐 수 없는 것이며, 끊임없이 변해가는 것이며, 영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인 언어로써는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의 목적은... 일념법설명과 같이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오직 자신의 생각의 생멸현상에 대해서 깨닫기 위해서이다.
인간이 행복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일념명상법으로써의 '유상삼매'에서이다.
일념이 익어지고 익어져서... 일념이 깊어질 무렵... 가령 '일념상태'가 하루에 대여섯 시간동안 이어질 수 있는만큼의 경지에 이르렀을때, 그때 비로소 '인간 세상에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스스로 확인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저절로 미소가 번지고... 세상에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있으면, 어디 나와 보라고 그래... 라는 말이 아무런 거부감 없이, 너무나도 당연하기 때문에... 저절로 흘러 나오게 된다.
일념법수행의 시작은 미약하기 이를데 없다. 하지만... 유상삼매에서의 그런 행복감을 경험하기 때문에 오직 그 길 이외에 다른 길을 갈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일념이 무르익을수록 그런 행복감 또한 작고 사소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행복감과 비교할 수 없는 더 큰 기쁨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믿어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석가모니의 6 년, 예수의 7 년, 달마대사의 9 년이라는 시간들...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네 시작은 미약하기 이를데 없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은 사실상 '일념법수행'과 같은 수행의 길에 들어서는 일을 뜻하는 말이며, 좁고 험난한 길이라는 말 또한 자아의 완성을 위한 수행의 길을 이르는 말이다.
우상숭배가 아니라... 빛이나, 환상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있다면... 그대의 본래의 나를 찾는 일이다.
그 일이 아니라면 어떤 일도 가치 있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본래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의 그대의 존재 또한, 본래 근본원인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념법이 진리이다.
왜냐하면 그대 마음의 근원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인연있는이에게 영원한 평화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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